지역별 뉴스를 확인하세요.

많이 본 뉴스

광고닫기

[중앙신인문학상] 평론 부문 가작 "상실과 실어를 치유하는 글쓰기-한혜영론"

언어학자 촘스키는 언어를 통한 문법의 습득 과정이 직관 추측 모든 종류의 방법론적 힌트와 과거 경험에 대한 의존에서 비롯되어 규칙과 목록을 만들어 낼 수 있다고 말했다. 이러한 견해는 언어가 감정을 표현하는 음성적인 몸짓(vocal gesture) 같은 하위 단계에서 사고를 표현하는 명료한 음절의 상위단계로 진화되어 가는 일련의 과정을 겪었다고 주장한 칼 포퍼(karl popper)와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다. 하지만 언어 습득의 과정을 경험의 축적으로 이해하든 혹은 진화의 과정으로 이해하든지 분명한 것은 긴 시간과 지난한 노력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이미 이러한 과정 속에서 하나의 언어를 습득한 그래서 한 언어에 대한 직관이 이미 완성되었거나 혹은 상위단계로의 진화를 경험한 성인에게 새로운 언어는 어떤 의미인가 하는 물음이 발생한다. 더욱이 한 두주의 출장이나 여행이 아닌 송두리째 삶의 자리를 바꿔야 하는 이민의 삶에서는 어떤 작용을 하게 되는 걸까를 고민해야 한다. 새롭게 대면한 언어에 대해서는 그렇다 치고 이미 학습되어지고 축적되어진 언어에 대한 사용법에 대해서도 고민해야만 한다. 새로운 땅에서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이미 모국어는 또 다른 외국어가 되어 버린 상황에서 습득된 자신의 언어는 더욱더 고립되고 퇴화될 수 밖에 없다. 그런 환경 속에서 모국어로 글을 쓰는 창작의 활동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은 단순한 고통 이상의 것이다. 창작의 고통을 넘어선 실존의 고통을 수반한다. 퇴화와 투쟁하는 멀어져 가는 언어의 감각을 살리기 위해 무감각한 심장을 찌르는 자학의 산물이 이민 문학의 주소이다. 이민을 결정하고 익숙했던 삶의 자리를 떠나온 사람들에게 있어 언어는 지독한 실존의 문제이다. 한혜영은 시속에서 영어 습득의 과정을 좀처럼 거품이 일지 않는 질 나쁜 가루비누 같다고 표현한다. 하지만 정작 제한된 공간의 서문에선 고백한 이국 땅에서 모국어로 시를 쓰는 건 사막을 헤매는 전갈만큼이나 외로운 작업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누구도 강요하지 않는 그 외로운 작업을 그치지 못하게 하는 힘을 아무도 자기를 기억하지 못할 것 같은 불안감 때문이라고 정의한다. 자신의 존재를 기억하기 원하는 대상들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은 없지만 시인은 이 불안감을 해소하는 방법으로 끊임없는 '기억해내기'를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자신의 기억해 내기 속에 등장하는 그 주인공들에게 여전히 자신도 기억되기 원하는 내적인 욕망을 표현하고 있다. 그리하여 낯선 이국 땅에서 상실의 두려움에 떨며 원거리의 기억들을 끄집어내는 시인의 글쓰기를 단순한 '추억해내기'라고 표현하는 것은 그 고통의 질적 가치를 저하하는 표현이 되고 만다. 1. 실어-일정한 거리 제한 두 권의 시집에 수록된 130편에 달하는 시의 배경은 90%가 한국이거나 혹은 모호하다. 정작 90년 이후에 작가의 삶의 자리가 되고 지독한 언어의 재습득 과정이 되었던 미국 땅에서 얻어지는 소재들은 지극히 제한적이다. 그나마 이국적인 배경이 분명한 '태평양을 다리는 세탁소'는 뉴욕에 머물고 있는 동생을 소재로 하고 있고 자신이 머물고 있는 플로리다 '아득한 횃대'에 등장하는 주인공의 주소는 넓은 미국 땅 전체에서 한 치도 줄여질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하고 있지 않는다. 그나마 '뜨거운 상상' 속에서 겨우 부끄러운 새색시처럼 살림을 차렸다고 고백한 곳이 시인이 현재 머물고 있는 플로리다이다. 시의 소재 속에 현재의 시간들이나 시선에 들어오는 배경들이 지독하게 결핍되어 있는 이유를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한혜영의 시작이 '기억해내기'에 초점이 맞춰진 이유도 있겠지만 작가 스스로의 의도된 절제의 결과이기도 하다. 그녀의 글쓰기는 철저하게 잊혀짐에 대한 방어 체계 구축에 집중되어 있다. 이 방어체계는 지나간 시간들에 대한 생생한 기억을 위한 몸부림과 동시에 새로운 삶의 자리에서 다시 축적되어 하나의 문법 체계를 이루어 가는 또 다른 언어들에 대해서도 지극히 경계적이다. 이미 일상의 언어들이 되어 단순히 외래어라고 부르기엔 너무 익숙해져 버린 수없이 많은 단어들에 대한 경계가 그렇다. 결국 모국어에 대한 처절한 실어의 경험은 작가를 철저히 외로운 곳으로 몰아넣는다 조금만 경계를 늦춰도 쉽게 튀어 나오는 '오래 묵은 악기'에 등장하는 '포크를 잡은 손가락' 이나 '만루 홈런'에 등장하는 '옆집 펜스' 같은 표현들을 작가는 퇴고의 과정에서 수없이 많이 지웠을 것이다. 한국에서 글을 쓰고 있다면 이국적인 느낌이나 표현의 생경함을 위해 의도적으로 배치했을 단어들마저도 지극히 빈도수를 제한한다. 나 그리고 40년 전의 미친 바람을 기억하게 하는 소재로 '팜트리'를 등장시키는 시적 소재에게 마저 희귀성을 부여한다. 타인들에겐 풍성한 소재의 확장으로 여겨질 수 있는 이런 수없이 많은 단어에 대한 고집은 자신의 글쓰기를 한국문학의 큰 테두리 속에 두고 싶어하는 작가의 의지 표현이기도 하다. 굳이 선을 그어 이민문학의 영역으로 내몰리고 싶지 않은 시적 의지이다. 시가 거기서 시작되었고 거기에 있는 것들을 끄집어 내어 시를 쓰고 있다는 무언의 항변이다. 하지만 궁궐처럼 부산하게 언어들이 살아 숨 쉬는 한국을 떠나와서 여전히 모국어를 붙잡고 글을 쓰는 작가에게 가장 큰 곤욕은 익숙한 다른 언어들에 대체되어 하나 둘씩 감을 잃어가는 어휘에 대한 상실의 경험이다. 그것은 게으른 언어 훈련의 결과라기보다는 이미 하위 단계의 음성적인 기호들을 넘어서 사고를 전달하는 체계로 사용되어지는 상위 단계에 접어든 또 다른 언어의 진화의 결과이기도 하다. 늙은 장수 말(言)을 타고 협곡을 건너 대화강으로 가는 도중 말을 잃어버립니다 눈 깜빡할 사이 말(言)을 낚아채어다가 뼈도 살도 없이 감쪽같이 먹어 치우고 시치미를 뚝 따고 있는 이놈의 협곡서 장수 말을 잃는 게 한두 번이 아닙니다 〈중략> 오늘도 말(言)을 잃어버리고 허둥지둥 늙은 장수는 그 사이 잊어먹다니 그사이……… 낭패할 새도 없이 아무 말이나 붙들어서 타고 일단은 대화강 기슭을 도망쳐 나옵니다 -'눈 깜빡할 사이' 부분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것이라 자부했던 모국어의 단련이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대화강이란 장소에서 작가는 충격적인 실어의 경험을 하게 된다. 낭패할 새도 없이 아무 말이나 붙들고 도망쳐 나오지만 결국 이 처절한 실어의 경험은 새로운 문화와 언어에 대한 대면마찰을 극복하지 못하고 작가를 철저히 외로운 곳으로 몰아넣는다. 작가는 거기서도 언어를 포기하지 못하고 혼잣말을 시작한다. 이 나이에 벌써 혼잣말이 늘어간다 무슨 말인가 중얼중얼 이방의 언어처럼 어색하고 낯선 이말/ -'혼잣말이 두렵다' 부분 충격적인 실어의 경험도 시인의 글쓰기를 향한 열정들을 제거하지는 못한다. 그것은 창작의 열정에 비례한 작업이 아니라 존재의 실존의 욕망에 의한 생산의 과정이기 때문이다. 비록 누구도 듣지 않고 설혹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시인의 중얼거림은 멈추지 않는다. 그것은 언어의 감각을 상실하지 않으려는 노력이다. 사람에겐 더 이상 가능성이 없는 그 작업의 연장을 통해 시인은 새로운 시를 만들어 낸다. 정제된 언어인 시의 언어는 나무와 강물과도 소통이 가능하다. 하지만 그런 경지는 쉽게 가능해지는 것이 아니다. 철저한 외로움 속에서도 누군가에게 혹은 무엇인가에게 말걸기를 포기 하지 않을 때만 가능하다. 외로우니까 닭을 키우고 외로우니까 닭에게 말을 걸고 외로우니까 비로소 닭의 말이 해독된다 닭장에서 닭장에서 닭장에서 ------ 외로우니까 내가 보이고 외로우니까 나에게 말을 걸고 외로우니까 내가 비로서 해독된다. 과거 나는 공작이었다 짤랑 짤랑 수많은 인연의 장식들이 싱싱한 정오의 햇살을 받아 빛나던 시절 보여주면 볼 뿐 볼 필요라고는 전혀 없던 눈먼 공작의 한때였다. 수백개 황금 눈동자를 품으면 품는 대로 부화했던가. 깃털처럼 믿을 게 못되는 인연 그리고 세월이여 화려하던 꼬리 우수수 낙엽이 쏟아지고 문득 꾹꾹꾹꾹 닭소리를 내는 의심스런 모가지를 사정없이 비틀자 잠시 공작으로 오독되었던 닭은 결국 닭으로 판명되고 생목숨을 노리는 소리매 한 마리 허공 중에 까맣다. -'말 걸기' 부분 시인의 새로운 언어에 대한 해독은 닭장 속에서 이루어진다. 외로움에 대한 갈등과 소통의 단절은 얼마든지 그 자리를 접고 떠날 수 있는 이유가 된다. 자신이 머물 곳이 처음부터 여기가 아니었고 스스로도 닭이 아닌 공작이었다는 믿음을 버리지 않으면 된다. 하지만 시인은 여전히 닭장 앞을 떠나지 않는다. 끊임없는 말걸기를 시도하고 비로서 닭과 소통하는 방법을 배운다. 그리고 그 소통법을 통해 정작 스스로를 해독하는 방법을 터득한다. 그리고 한때 스스로를 오독했던 방식에 대한 회의를 품는다. 이 베이컨 식의 회의를 통해 작가는 비로서 스스로가 단절시켰던 것들을 발견하게 된다. 나는 쉽게 어제를 버렸다 매일 소멸되는 소량의 피처럼 가볍게 써버리는 동전처럼 버리고 돌아서며 잠시 흔들렸을 뿐이다 남겨진 것 중에 몸이 성한 것들은 서둘러 동굴을 빠져나가고 불구의 추억만 남아 낡고 초라한 어둠을 지키는 일 일단 버린 것들은 버린 것이다 저마다 잊힐 만큼은 잊혀져서야 비로서 어제가 되었으므로 〈중략> 나는 무엇을 버릴 수 있다고 믿었을까 무엇을 과거는 아무 것도 흘러가는 물이 되지 않았다 어느 한순간에 울컥 되돌아오는 과거는 역류의 기회만을 엿보며 침체된 내 영혼의 하수구 속에서 다만 때를 기다리고 있었을 뿐이다. -'과거는 아무것도 흘러가는 물이 되지 않는다' 말걸기를 통해 스스로의 존재를 발견했던 시인이 시간이라는 개념을 통해 또하나의 발견을 경험한다. 단추 하나만 누르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는 초 시계의 기능과는 다른 시간이 때를 기다리면서 침체된 하수구속에 숨어 있었다는 걸 발견한 시인의 각성은 비로소 스스로 묵살해버린 어제가 오래된 추억들과 해후하는 다리가 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 어제와의 진정한 화해를 통해 시인은 실어의 충격을 극복해 간다. 시인은 다시는 그 시간을 부화시켜 날개를 달고 날아가게 하지 않으려고 한다. 시인이 감정의 체온을 허락하지 않고 품어왔던 알들이 아직도 시인에게 가득하다. 그 알들을 향해 겉옷을 벗고 체온을 나누어 품은 작업이 시를 쓰는 작업이다. 꽁꽁 얼려 사장시킨 기억을 끄집어 내어 부화시키는 작업이기도 하다. 스스로 두었던 거리제한에 대한 해제이다. 2. 방생-기억으로의 회귀 대체로 한국어로 지어진 이름들은 영어로 발음하기가 어렵다. 발음이 어려운 단어를 기억하기가 어렵듯이 어려운 이름도 마찬가지다. 모두가 비슷한 시기에 미국식 이름에 대한 무언의 압력을 받는다. 처음엔 그 이름으로 자기를 불러도 쉽게 반응하거나 뒤돌아 서지지 않던 이름이 점점 익숙해져 가면 본명은 먼지가 쌓여 간다. 하지만 추억의 통장은 영어 이름이나 가명으로 개설되지 않는다. 과거와의 단절을 결정했던 사람들은 많은 것들을 버리고 떠나온 사람들이다. 이름 석자가 깊숙이 파인 도장은 작은 부피임에도 불구하고 커다란 이민 가방에 들어가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 도장으로 열람이 가능한 통장에 가득한 추억의 부피를 쉽게 간과해 버리는 경우가 많다. 통장을 개설하려고 십 년만에 목도장 하나를 팠어 한.혜.영. 서서히 살아나는 글자를 지켜보다가 울컥 서러웠어. 그 동안 어디를 헤맨 것이냐 도장을 판 이가 나를 건네주었을 때 눅눅한 알몸에서 곰팡내가 훅 하고 끼쳐왔어 어쨌거나 맴 먼저 했던 일은 추억을 찾는 일이 었어 차압당한 시간 차압당한 거리 차압당한 젊음이 찰랑찰랑 긴 머릴 나부끼며 돌아괴 시작했어. 논현동 하늘에 노랗게 쏟아지던 은행잎이며 어쩌다 들어온 햇살이 혓바닥을 날름거리던 반지하 셋방 는개 뿌옇게 내리는 산자락에 어머니가 안방으로 돌아오고 팔십년대 말 추적추적 비에 젖으며 저만큼 멀어져가던것들 모두가 돌아왔지 그랬어 그저 추억의 끝자락마다 도장만 누르면 되었던 거야 내 눈물 내 붉은 심장의 피를 듬뿍듬뿍 묻혀서는 꾹꾹…/(이하 생략) -'추억의 잔고 중에서' 부분 작은 목도장 하나에 새겨진 이름이 미이라처럼 사장된 추억에 혈관을 펌프질하자 추억이 생기를 얻게 된다. 어떤 기억이라도 모조리 살아난다. 어떤 기억이라도 생기를 갖고 색상을 갖는다. 하지만 시인의 분명이 이 잔고 중에 다른 것들이 남아 있음을 제목에서 암시한다. 이번에는 이름이 새겨진 목도장만으론 힘에 부쳐 큰 '작정'을 해야만 하지만 그래도 그녀의 기억을 향한 방생은 가속도를 잃지 않는다. 한 사람의 절망이 그처럼 쉽게 막을 내리는 무대는 처음이었네 흥행에 실패한 악극단 단장처럼 지린내 풍기는 천막 사이로 멀어져갔던 아버지 그 날 이후 어린 단장이었던 나 오늘은 그 분을 불러 공연을 부탁할 작정이네 번번이 실패했던 간판 서둘러 바꿔버리고 깊이 잠들었던 그 날의 징소리 화들짝 깨워볼 작정이네 아버지-이 아버지-이 사십 년 세월이 징징 목을 놓자 일곱 살에서 딱 멈춰버렸던 동생의 빨간 자전거 다시 굴러가고 상복 입은 채 철없이 고무줄 뛰던 딸년의 마당으로 아버지 절름절름 발 다쳐 돌아오시네 아 이처럼 완벽한 그리움이라니 진작에 아버질 무대에 올려야 했네 삶은 늘 밑지거나 본전이지만 그리움은 언제든 이렇게 남는 장사인 것을 벌써 암표 장수까지 얼씬거리는 술잔 속 아버지의 죽음은 영원한 성공이었네 작은 목도장 하나에 새겨진 이름이 추억의 통장처럼 기억을 되살려낸다 -'그날 이후' 전문 아버지를 중심으로 펼쳐진 가계도엔 복잡한 사건들이 연루되어 있다. 시간과 관계의 단서들이 비교적 직설적으로 노출된 이 작품 속의 아버지의 기억해내기의 소재를 넘어서 부활시키기의 단계까지 진행된다. 기억의 생명력이 작은 목도장에서 시작되었다면 아버지를 부활시키기 위해 그녀의 어린 단장의 모든 경험을 모아 무대를 만들었다. 아버지의 흥행에 실패한 아버지의 앵콜 무대엔 많은 사람들이 초대되지 못했다. '양철북'의 오스카처럼 성장이 멈춰버린 동생과 자신만이 앉아 절망의 막이 내렸던 아버지의 무대를 다시 올렸다. 단 일회의 공연으로 충분히 이윤을 남긴 시인은 얼씬 거리는 암표장수들의 유혹에 굴하지 않고 마지막 성공의 무대를 끝으로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방생한다. 시인의 그 일회적인 방생으로 수없이 많은 기억들과 조우한다. '비겁한 소방관'에선 병으로 떠난 언니를 '아직은 알 수 없으리'에선 조카가 등장한다. 작가 스스로가 가두어 두었던 공간속에서의 진정한 탈출과 탈피가 가능해졌다. 시간의 제약도 없어졌다. 60년대의 기억도 자유롭다. 누구든지 끄집어내도 기억은 사용료를 내지 않고 '날마다 이자가 붙어 잔고'가 늘어간다. 3. 상실-치유의 글쓰기 스피노자의 신체이론에 따르면 인간 정신은 자기 신체 변용의 관념에 의해서만 외부물체를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인식하게 된다. 내부적인 소멸은 신체 보존의 욕망에 반하고 소멸의 경험은 모든 인식의 방법에 새로운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리하여 신체적인 이 소멸의 경험은 죽음에 대한 직관을 향상시키며 이 직관을 넘어선 체험이 비로소 영원으로 통하는 문을 발견하게 하는 힘이 된다. 과거와의 화해를 이루어 가고 있는 시인에게 갑자기 찾아온 여성으로서의 신체적인 변화가 시인의 글쓰기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이 사건이 시인의 죽음에 대한 자세를 바꾸는 결정적인 시간이 된다. 여자의 궁전을 찬찬히 둘러본 하얀 가운이 말합니다 무덤이 거의 완성되었군요 칠성판을 준비하는 검은 손가락들 부쩍 소란해졌습니다 아직은 할 일이 남아 있어요 제발 추억이라도 몇 조각 내벽에… 거의 죽은 여자가 창백한 입술을 달싹거립니다 -'어떤 대화'부분 내적 죽음의 각성이 현실에 존재하는 죽음에 대한 깊은 통찰을 가능케 하고 그 속에 존재하는 상실의 의미들을 치유하기 위한 공감이 시작된다. '뱀 잡는 여자'의 화자는 이 죽음의 사건에 있어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로 등장한다. 죽음의 공간에 가해자로 나서는 경험을 통해 발견한 두려움이 결국은 스스로의 신체의 변화를 인정하고 딛고 서는 기회가 된다. 그리고 이 죽음의 본질에 더욱 가까워지는 이 경험을 통해 죽음에 대한 시선들이 확장된다. 생리적 현상으로 이분화 된 여자의 생은 삶과 죽음의 현상으로 연장되고 이 과정에 대한 자기 성찰이 타인의 죽음의 문제에 대한 공감을 가능케 한다. 돌이켜보면 추웠던 그때 그 시절 햇살이 있어 살아남았습니다 점심 굶는 아이들 옹기종기 모여 앉은 학교 담벼락 새 모이처럼 흩뿌려지던 햇살만 주워 먹고도 나 여기까지 당도했는데 꿈도 희망도 없어 지지리도 가난한 요즘 사람들은 정부보조금처럼 죽지 않은 만큼 배달되는 햇살을 도저히 참아낼 수가 없는 모양입니다 썩어 뚝뚝 떨어지는 그 중에서도 가장 완벽하게 잘 썩어버린 하늘 한 조각을 잡고 어떤 어미가 셋이나 되는 애들들 데리고 끄덕끄덕 세상 바다를 건너갔다는 나쁜 소식 잘 도착했을까 추울 텐데 그곳엔 학교 담벼락 같은 건 하나도 없을 텐데 나 종일토록 그들이 건너간 죽음의 나라를 생각했습니다. -'나쁜 소식' 전문 죽음에 대한 고찰의 과정을 거치면서 시인의 글쓰기는 내적 상실과 실어의 모든 사건들을 향한 치유의 과정을 모색한다. 시인은 이 과정을 통해 생산된 시를 따뜻한 온천수에서 피부병 환자들의 상처를 치료하는 닥터 피쉬와 같다고 정의한다. 이민의 삶을 통해 경험하게 되는 수없이 많은 상처와 아픔들을 향해 달려가는 시인의 태도에 대한 정의이기도 하다. 상처로 인해 일어난 각질은 원래 피부의 일부였다. 기억도 그렇고 시도 그렇다. 언제나 삶의 일부다. 그것은 이민의 경험을 통해 삶의 자리가 변해서 유목민처럼 떠돌아야 하는 환경 속에 놓여 있다 하더라도 언제나 마찬가지이다. 그러하기에 한혜영의 글쓰기는 상실과 실어의 치유를 위한 글쓰기를 넘어서려 한다. 이제 더 이상 추억의 옛집에 방문하는 일에 머무르지 말고 날개 지치도록 날아서 지구 전체에 다다르는 글쓰기가 되려고 한다. 〈끝>

2009-05-14

[중앙신인문학상] 논픽션 가작 "장미꽃 눈물"

오랫동안 돌아가지 않아 먼지만 잔뜩 끼어 있을 천장의 선풍기를 쳐다보는 것으로 잠을 쉽게 잘 수만 있다면 나는 굳이 감기약을 찾아 나설 이유가 없다. 정말이지 잠을 이루지 못하는 밤 침대에 누워 천장의 선풍기만 하염없이 쳐다보다 찾는 것이 감기약이다. 잠 못 이루는 사람을 위해 수면제가 버젓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내가 굳이 감기약을 찾는 이유는 안경을 코 끝에 걸친 늙은 약사 때문이었다. 그로서리 스토어를 들른 김에 스토어 안에 있는 약국을 찾았었다. 잠이 오지 않는 날이 여름철 우기처럼 구질구질하게 연속되던 어느 날 저녁이었다. 누가봐도 내 몸에는 부족한 잠으로 피곤이 덕지덕지 달라붙어 있었다. "수면제보다 감기약을 먹어 보세요. 감기약이 몸에 덜 해로울테니까요." 어떤 수면제가 좋은 것이냐고 내가 물었을 때 은퇴가 멀지 않을 것 같았던 할아버지 약사는 그렇게 대답했었다. 그의 코 끝에 안경이 떨어질락말락 아슬하게 걸쳐져 있어 나는 불안한 마음으로 그의 안경을 쳐다 보아야 했다. 그때부터였다. 밤에 침대에 누워 돌아가지 않는 천장의 선풍기를 쳐다보는 시간이 마냥 길어질 때면 나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감기약을 찾아 나섰다. 그날 밤도 그랬다. 침대에서 일어나 거실로 나간 것은 순전히 감기약 때문이었다. 물론 내 얼굴엔 콧물도 없었고 기침도 나오지 않았다. 잠 못 이루며 천장만 열심히 쳐다보다 일어난 내 몸은 철근을 박아 놓은 듯 무겁기만 할 뿐이었다. 밤의 어둠 속에 묻혀 있어야 할 거실은 웬일인지 환히 밝아 있었다. 십 년 전 이사올 때 장만해서 이젠 여기저기 주름이 많이 잡힌 검정 가죽 소파에 아내가 무심히 앉아 있었다. 아내의 얼굴이 어두워 보인 것은 소파의 어두운 검정색 때문은 아니었을 것이다. 램프의 밝은 불빛 아래에 환히 드러나는 아내의 모습이 마치 그림자가 드리운 듯 어두워 보였다. 아내가 앉아 있는 가죽 소파가 내려 앉을 듯 무거워도 보였다. 초점없는 시선을 허공으로 던지는 아내의 눈두덩이가 이젠 꽤 많이 부어 있었다. 그렇게 아내의 눈두덩이가 붓기 시작한 게 벌써 닷새째다. 겨울이 네 번 지나가는 세월 동안 치러낸 두 번의 투석 경험으로 보면 아내의 부은 눈두덩이가 주는 경고가 심상치 않았다. 굳이 부어 오른 눈두덩이가 아니더라도 몇일 전 부터 부쩍 말 수가 줄어 든 아내만 봐도 아내의 몸에서 일어나는 심상치 않은 변화를 나는 진작 알아차릴 수 있었다. 내가 아내 옆으로 다가가도 아내는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기만 할 뿐 굳게 다문 아내의 입은 열리지 않았다. 그러니까 그게 4년 전이었을 것이다. 아니 딸이 고등학교로 입학하던 해니까 4년 전이 틀림없다. 꼭두새벽에 아내가 자고 있던 나를 정신없이 흔들어 깨웠다. 겨우 떠진 흐릿한 내 눈 앞으로 아내는 자신의 얼굴을 쑥 내밀었다. 그 순간 나는 잠이 확 달아나며 벌떡 일어나 앉아야 했다. 아내의 얼굴이 퉁퉁 부어 있었던 것이다. 삼겹살로 배불리 포식한 전날 저녁만 해도 멀쩡했던 아내의 얼굴이었는데 꿈적도 하지 않고 눈만 껌벅이며 나를 쳐다보는 아내의 얼굴이 밤새 보름달로 변해 있었다. 아내의 얼굴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밤새 헝클어진 머리를 다듬으려고 눈을 부비며 거울을 들여다 보던 아내가 황급히 나에게로 달려온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아내의 얼굴을 보고 내가 그렇게 놀라 벌떡 일어나 앉았는데 하물며 평소 자신의 얼굴은 간데없고 딴 사람 얼굴이 거울에 비쳐진 아내는 오죽했을까. 투석튜브에 이별을 고한 아내의 얼굴에 2년만에 다시 보름달 현상이 나타났다 하루만 더 기다려보자는 아내의 말을 무 자르듯 싹둑 자르며 아내를 급히 차에 태웠다. 제일 먼저 떠 오른 병원이 집에서 몇 블럭 떨어져 있지 않은 응급처치 병원(Urgent Care Center)이었다. 새벽 공기를 가르며 병원으로 달리는 차는 분명 날았다. 병원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 서는 우리를 보고 마치 기다리고 있은 듯 의사가 지체없이 우리에게 다가왔다. 아내의 얼굴을 들여다 보던 의사는 우리에게 숨 쉴 틈도 주지 않고 우리 등을 밖으로 떠 밀었다. "빨리 종합병원으로 가 보세요." 의사는 다급하게 소리를 질렀고 나는 앞이 캄캄했다. 의사에게서 '응급조치 요망의 환자'라는 쪽지를 건네 받은 나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기까지 했다. 차량이 드문 이른 새벽이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정신없이 달리는 내 차가 도로를 채운 차량들 사이에서 박고 받치느라 온전할 리가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종합병원은 멀리 있었다. 달려도 달려도 종합병원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때 달린 이십 분은 내가 매일 출근하는 학교까지의 짧은 이십분이 절대로 아니었다. 도로 위를 달리는 차 바퀴가 제자리에서만 헛도는 듯 병원은 감감무소식이었다. 종합병원 응급실의 환자 대기실로 들어 선 것은 서서히 밝아오는 새벽의 붉은 기운이 종합병원의 네온사인 불빛을 조금씩 갉아 먹고 있을 때였다. 환자 대기실은 이리저리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로 이미 새벽의 적막이 깨어져 있었다. 병원의 직원에게 보험카드를 내밀고 집 주소와 전호번호까지 다 밝힌 다음 대기실의 빈 의자를 찾아 앉았다. 대기실에 켜놓은 TV는 화면이 끊임없이 변하며 뭔가를 지껄이고 있었지만 내 눈은 건성이었고 내 귀는 꽉 막힌 듯 아무 소리도 들어 오지 않았다. 그래도 초조한 마음으로 둘 곳없는 내 눈을 계속 TV에 붙이고 있을 때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 속에서 한 나이팅게일이 우리에게 다가와 아내의 손을 잡으며 응급실로 인도했다. 그때 비로소 나에게서 안도의 숨이 길게 빠져 나올 수 있었다. 온통 병원 로고 투성인 가운으로 바꿔 입은 아내에게 의사가 찿아오고 아내의 손을 잡아 끌었던 나이팅게일이 여러가지 검사로 몇 번 다녀간 뒤 아내는 일반 병실로 옮겨질 수 있었다. 병실에 달랑 하나 뿐인 의자에 앉아 아내의 손 등에 꽂힌 튜브 속으로 방울 방울 떨어지는 투명한 링겔액을 쳐다보며 새벽부터 놀랐던 나의 가슴을 조용히 쓸어 내렸다. 아내는 눈을 감고 있었다. 잠을 자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종합병원까지 달려 오는 내내 아무 말이 없었던 아내의 가슴에도 폭풍이 한바탕 휘몰고 지나 갔으리라. 아내도 자신의 가슴을 진정시키는 시간이 절대로 필요했던 것이다. "신장에 이상이 생겼군요." 아내의 손등에 주사바늘을 꽂아 채취해 간 혈액검사의 결과를 보면서 의사는 아내의 보름달 얼굴의 주범이 신장이라 했다. 의사는 손가락으로 아내의 부은 다리를 손가락으로 눌러 보았다. 아내의 다리에는 이내 분화구가 생겼다. 눌린 부위가 올라 오지 않고 움푹 파인 채 그대로 머물러 있었기 때문인데 내가 보기에는 상당히 심각해 보였다. 그러나 혈액검사의 수치는 아직 투석기준을 넘지 않고 있었다. 투석은 말만 들어도 섬뜩하다. 먼저 약으로 신장의 기능이 회복되는지 지켜보자던 의사의 처방에 따라 병실로 배달된 약을 앞에 놓고 아내가 매번 정성스레 십자가 성호를 그은 것도 투석은 피하고 싶은 심정 때문이었을 것이다. 병원에서 흘러간 일주일은 참으로 길었다. 시간이 흐르지 않는 듯 했다. 화살처럼 흐르던 시간이 마치 병원이라는 큰 웅덩이 속에 갇혀 버린 느낌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긴 일주일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아내의 얼굴은 여전히 보름달이었고 약을 앞에 놓고 성호를 긋는 아내의 정성은 계속되고 있었건만 아내의 다리는 여전히 분화구를 만들고 있었다. "아무래도 투석을 해야겠습니다." 매일 조금씩 올라가던 혈액검사 수치는 결국 누구도 원하지 않는 투석 기준을 넘고 말았다. 의사는 당장 투석 절차를 밟겠다는 말을 남기고 병실을 나갔다. 의사가 빠져 나간 병실은 일순간 적막감에 젖어 들었다. 아내에게 무슨 말을 해야겠는데 내 얼굴에서 입이 사라진 걸까 나에게서는 아무 말도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의사가 사라진 곳으로 아무 말 없이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던 아내가 벽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담요를 조용히 뒤집어 썼다. 그리고 아내의 어깨가 조금씩 들썩이기 시작했다. 아내의 등에 가만히 손을 얹었다. 담요 위로 아내의 등을 쓰다듬는 내 손에 감당하기 힘든 아내의 실망이 잔잔히 전해져 왔다. 다행인 것은 투석을 시작하고 하루가 다르게 보름달을 벗어나기 시작하는 자신의 얼굴과 몸을 보면서 아내의 얼굴이 많이 밝아졌다는 사실이다. 하루 하루 붓기가 확연히 가라앉으면서 보름달은 점차 초생달로 변해갔고 높기만 하던 혈액 검사의 수치들도 정상으로 되돌아 오고 있었다. "진작 투석할 걸." 며칠 전만해도 상상할 수 없는 말을 아내는 이제 농담조로 할 수 있을 정도였다. 아내가 가슴에 달았던 투석 튜브와 이별을 고한 것은 투석을 시작한지 한달만의 일이었다. 투석 튜브와 이별 뒤에 남은 것은 아내의 가슴에 선명히 드러나는 수술 자국이었다. 지난 추억을 되새기 듯 나는 그 수술 자국을 부드럽게 어루만져 보았다. 마음이 아프거나 슬픈 감정은 일어나지 않았다. 힘든 투석을 잘 견뎌낸 아내가 그저 고마울 따름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아내의 얼굴이 다시 보름달 현상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 2년의 세월이 흐른 후였다. 따지고 보면 재발의 원인에는 먹는 것에 조심하지 않은 우리의 잘못도 있었다. 아내와 나는 아내의 신장병이 결코 재발하지 않을 완치로 생각했었다. 2년 전 우리를 휩쓸고 지나간 태풍이 처음이자 마지막인 줄 알았다. 역사 속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영원히 사라진 태풍이라 생각했었다. 그래서 짭잘하고 달착지근한 양념이 들어간 음식이 있는 식당을 찾아가는 데 별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한식을 먹을까 양식을 먹을까로 고민하던 시간에 아내의 신장을 걱정하던 마음은 별로 없었다. 경험은 똑 같은 상황이 벌어졌을 때 현명하게 대처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 것일까. 예상치 않게 다시 찾아온 아내의 보름달 얼굴에 적잖게 당황은 하였지만 병원을 향해 달리는 차 안에서 나는 처음처럼 정신을 잃지는 않았다. 차창을 통해 내 눈에 들어오는 바깥 세상이 어두워 보이긴 했어도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암흑같은 세상은 아니었다. 이번에도 치료가 잘 되리라는 희망이 검댕이 숯 같았을 세상을 조금이나마 밝혀 주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내의 입으로 들어가기 전 십자가 성호를 그었던 약이 두번째는 없었다. 2년전에 아무 효과가 없었던 약이 두번째라고 특별히 괴력을 발휘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의사는 곧장 아내를 수술실로 데려갔고 수술실에서 아내의 가슴은 투석 튜브와 재회하는 아픔을 가져야 했다. 투석이 시작되면 누구도 투석을 언제 그만 두어야 하는지 아무도 모른다. 의사조차도. 그러나 다행이었다. 두번째 투석도 첫번째처럼 거의 정확히 한 달 만에 끝이 났다. 하지만 아내와 나는 2년 전처럼 마냥 기뻐할 수는 없었다. 언제고 또 다시 찾아올지 모르는 보름달의 불안감을 완치로 생각했던 처음처럼 우리의 머리에서 싹 지워 버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아내의 가슴이 또 다시 투석 튜브와 아쉬움없는 이별을 고하고 병원을 나설 때 아내의 얼굴은 기쁨 대신 결의에 가득차 있었다. 다시는 투석 튜브를 몸에 달지 않으리라는 아내의 비장함이 집으로 달리는 차 안에 가득했다. 그리고 아내는 달라지기 시작했다. 레스토랑에 아예 발길을 뚝 끊는 것으로 시작해서 몇 십년 만에 간신히 임신에 성공한 임신부 못지 않은 아내였다. 아니 천신만고 끝에 들어선 아기가 어찌될까 밤낮으로 신경쓰는 임신부의 모습이 바로 아내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환영받지 못할 보름달은 또 다시 아내의 몸을 찾아왔다. 또 2년 만이었다. 한 달 주기로 하늘을 찾는 보름달이 아내의 몸을 찾는 데는 마치 2년마다인 것처럼 누가 무슨 수를 쓰든 그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주기가 있는 것처럼 그렇게 보름달이 또 다시 2년만에 아내를 찾아온 것이다. 내가 곁에 다가가도 아무 말없이 거실의 소파에 앉아 있는 아내의 얼굴에 보름달기가 다시 비치고 있었던 것이다. 그동안 공들인 아내의 노력이 별 것 아니라는 듯 지난 며칠간 조금씩 부어 오르는 자신의 몸을 보면서 아내는 잠을 이룰 수 없었으리라. 어쩌면 그런 노력을 외면한 자신의 몸에 아내는 심한 배신감을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잠이 오지 않아 내가 찾아 나선 감기약이 거실의 소파에 앉아 있는 아내의 불면까지도 해결해 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지만 그럴 리는 없었다. 아내는 매일 복용하는 신장약 외에 어떤 약도 입으로 가져 가질 않았다. 비타민도 예외일 순 없었다. 하물며 감기약은. "몸이 더 붓기 전에 투석하자." 내가 아내 곁으로 다가가도 아내는 아무런 미동이 없었다. 그런 아내를 안타깝게 바라보며 말하는 내 목소리가 약간 명령조이긴 해도 힘이 하나도 들어 가지 않은 것이 차라리 애원에 가까웠다. 나에게서도 이젠 멀리 달아난 잠은 감기약이 아니라 초강력 수면제를 입으로 털어 넣는다 해도 결코 돌아 오지 않을 것이다. 멀리 달아난 잠이 오히려 고마웠다. 거실에서는 부어 오른 얼굴로 소파에 앉아 잠 못 이루는 아내 침대에서는 다리 쩍 벌리고 코 골며 자고 있는 남편. 결코 아름다운 그림이 될 수 없으리라. "그렇게 하도록 해 응?" 나의 목소리는 이젠 아예 100퍼센트 애원이었지만 아내는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대답없는 아내의 처진 어깨를 내려다보며 나는 슬펐다. 희망을 포기한 사람의 어깨가 그렇게 축 처지는 것이라면 아내는 이미 희망을 포기하고 있는 것이다. 어쩔 수 없잖아. 투석을 하는 수 밖에. 아내의 축 처진 어깨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밤의 긴 어둠이 지나고 밝아 온 아침에 아내의 얼굴이 조금은 밝아 보였다. "의사에게 전화를 걸어야겠어." 투석을 하는 것으로 마음을 정한 탓일까 아내의 목소리가 경쾌하게 들렸다. 그동안 혈액검사로 아내의 몸을 죽 지켜보던 의사도 투석을 생각하고 있었다는 듯 아내와 통화를 끝내자마자 지체없이 그 날 오후로 수술 스케줄을 잡았다. 그날 해가 지기 전 수술실을 나서는 아내의 가슴에 낯익은 투석 튜브가 다시 부착되어 있었다. 세번 째였다. 제발 이번이 마지막이기를. 침대에 실려 입원실로 옮겨지는 아내를 보며 이번에는 내가 십자가 성호를 그었다. 그게 어디 나만의 심정이었을까. 침대에 실려가는 아내에게도 엄마의 손을 놓지 않고 침대를 따라가는 딸에게도 네 번은 분명 존재하지 않는 숫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약 냄새 자욱한 병원에서 우리 가족이 다시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치 않았었다. 도리어 그 반대였다. 얼마 전만 하더라도 우리 가족 세 사람은 부둥켜안고 환호하는 기쁨을 누렸었다. 아 그 기쁨은 아직까지 기억에 생생한 삼개월 전이었다. 내셔널 고등학교 오케스트라(National High School Honors Orchstra) 선발은 2년마다 열리는 행사다. 내셔널이라는 오케스트라의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미국 전 주를 포함하는 전국적인 행사다. 이 오케스트라에 각 고등학교 오케스트라 단원 중에서 고등학교 3학년과 4학년만 지원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고등학교 4년 동안 이 오케스트라에 지원할 수 있는 기회는 단 한 번 뿐이라는 것이다. 단 한 번 밖에 주어지지 않는 기회를 놓칠 고등학교 오케스트라 단원은 아마 없을 것이다. 내셔널 오케스트라의 단원은 겨우120명. 수천명이 넘을 지원자를 생각하면 그 오케스트라에 선발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울 것인지 쉽게 짐작이 간다. 어쩌면 낙타가 바늘 구멍 통과하는 것 만큼이나 어렵다고 할 수 있을까. 내셔널 오케스트라의 바이올린 부분에 합격을 알리는 두툼한 편지 봉투를 뜯고 난 딸이 소리를 지르며 기뻐 날뛴 것도 그래서 무리는 결코 아니었다. 딸은 인디언이 춤추듯 발까지 두두둥 바닥을 굴렀다. 어디 그게 딸만의 기쁨이었을까. 딸의 기쁨 속에 아내와 나의 기쁨도 서슴없이 끼어들었다. 서로 껴안은 우리는 환희의 결정체였다. 기쁨이 사방에서 뿜어나오는 하나의 덩어리였다. 소리를 지르고 발을 구르고 손을 하늘로 높이 뻗어 올렸다. "빨리 비행기 표부터 구입하자." 지체없이 인터넷을 뒤져 비행기표를 알아보는 아내의 마음은 벌써 행사가 열리는 뉴멕시코 주의 알버커키(Albuquerque)를 향해 날고 있었다. 그때만 해도 아내의 몸은 보름달이 전혀 오지 않을 가늘고 연약하기만 했던 초생달이었다. 오케스트라의 리허설 준비로 나보다 나흘 먼저 알바커키로 떠나는 딸의 아픈 마음을 나는 어렴풋이 헤아릴 수 있었다. 연주회 날 딸은 관람석으로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 보겠지만 엄마의 모습은 딸의 눈에 들어오지 않을 것이다. 공항으로 가는 차에 올라 타기 전 딸은 엄마를 꼭 껴안았다. 바닥에 내려 놓은 바이올린을 집어 들어 딸의 어깨에 걸어주는 아내도 마음이 아팠으리라. 아내의 몸이 낫는다 해도 두 번 다시 찾아 오지 않을 연주회였으니 아쉬운 마음도 더 해졌을 것이다. "엄마가 못 가서 미안해. 대신 집에서 열심히 응원해 줄게." 서로 다시 한 번 껴안는 아내와 딸은 웃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은 울고 있었을 것이다. 내 마음처럼. 차의 운전석에 앉아 그것을 지켜보는 내 마음은 형언할 수 없는 그 무엇으로 흥건히 적셔지고 있었다. 장미꽃 보다 아름다운 아내의 얼굴엔 땡큐대신 눈가를 적시는 눈물만이 있었다 공항 안에서 케이트 쪽으로 사라지는 딸을 쳐다보며 집으로 발길을 천천히 돌리는 내 마음은 겨울 바람에 떨어진 낙엽이 쌓여가듯 착찹하기만 했다. 이제 나흘 후면 내가 알버커키로 출발해야 한다. 투석 튜브를 가슴에 꽂은 채 큰 집에 덩그라니 홀로 남겨진 아내의 심정은 과연 어떠할까. 그리고 비행기 안에서 아내의 빈 좌석을 쳐다보는 내 심정은 또한 어떠할까. 아마도 그렇게 아내를 집에 두고 혼자 떠나야 한다는 생각으로 요 며칠 사이 내 마음이 심란했음이 분명하리라. 그렇지 않고서는 오늘 아침 내가 아내의 생일을 깜빡했을 리가 없다. 정말 그랬다. 오늘 아침 잠에서 깨면서부터 내 마음은 정말이지 착찹했다. 감기약을 복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잠까지 설친 지난 밤이었다. 내 몸과 마음은 포크레인으로도 들 수 없을 만큼 무거웠고 알버커키로의 출발은 무거운 내 마음과는 아랑곳없이 불과 이틀 뒤로 다가와 있었고 아내의 가슴에는 여전히 투석 튜브가 부착되어 있었다. 더군다나 아내는 튜브를 가슴에 단 채 학교를 나가고 있지 않았던가. 아내는 일 주일 전부터 자신의 직장인 학교로 출근하고 있었다. 지난 한 달의 투석으로 거동이 한결 수월해진 아내가 강의 걱정을 하기 시작한 것이 일주일 전이었다. 아내가 맡고 있던 강의들은 아내가 투석을 시작하면서 임시 강사에게 맡겨지고 있었다. 임시 강사야 제 나름대로 최선을 다 하겠지만 그것이 아내의 강의와 똑같을 수는 없었을 것이고 또 학생들 중에는 아내의 강의를 수강하기 위해 한 학기를 기다린 학생들도 있다고 아내는 나에게 말했었다. 아내의 수업을 선택한 학생들에게 실망을 안겨주고 싶지 않은 것이 아내의 심정이었고 그래서 자신의 수업이 잘 진행되고 있는지 궁금해진 아내가 학과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 교수가 강의하는 것처럼 매끈하게 진행이야 되겠어요? 그렇다고 너무 신경쓰지 말아요. 빠른 회복에만 신경 쓰세요." 아내의 수업이 무리없이 진행될리 없음은 아내도 예상은 했었다. 하지만 예상하는 것과 학과장으로 부터 직접 예상했던 말을 듣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이것봐. 움직이는데 별로 불편하지 않아. 학교 나가는데 별 지장없어." 아내가 학과장과 통화를 끝낸 후였다. 가슴에 달린 튜석 튜브가 몸을 움직이는데 걸림돌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자신의 몸을 앞 뒤로 약간 움직이며 아내가 학교에 나가봐야겠다고 말했을 때 나는 손을 내저었다. "말도 안돼. 그러다가 무슨 사고라도 나면 어쩌려고…." 그러나 아내는 완고했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아내의 운전기사 노릇 밖에 없었다. 아내의 학교와 나의 학교 그리고 집 사이를 오고 가는 시간을 계산하면 운전기사 노릇이 나의 바쁜 업무에 사실 그리 쉽지는 않았지만 몸이 성치 않은 아내를 위해서라면 지구도 몇 바퀴 돌 수 있었다. 그건 내 진심이었고 그 진심을 아내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내는 자신의 몸이 내 업무의 걸림돌이 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것 또한 아내의 진심이었다. 아내의 고집을 꺾을 재간이 없었던 나는 아내의 운전기사도 되지 못했다. 대신 매일 아침 아내가 차의 시동을 거는 모습을 아픈 가슴으로 쳐다 보야야 했다. 옷으로 가려진 투석 튜브의 윤곽이 아내의 가슴에서 선명히 드러날 때 그 튜브는 바늘이 되어 내 가슴을 찔러 왔다. 오늘 아침도 일찍 일어나 출근 준비를 시작한 아내가 차에 올라타 시동을 걸었다. 아내가 입은 옅은 갈색의 스웨터로 드러나는 튜브의 윤곽이 오늘따라 더 선명했다. 그것을 바라보는 내 마음은 파란구석이라고는 전혀 없는 온통 먹구름 투성이었다. 집을 벗어난 아내의 차가 멀리 한 점으로 변하자 나도 차에 몸을 실었다. 학교로 향하는 차가 저절로 굴러가는 느낌이었다. 내가 차 안에 있는지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학교로 들어가는 길목의 신호등에서 멈춰 선 차는 더 이상 움직일 줄 몰랐다. 내 머리는 추수가 끝난 듪판처럼 텅 비어 있었다. 아무 것에도 신경이 가지 않았다. 뒷차가 경고음을 길게 울리지만 않았어도 내 차는 종착지에 도착한 듯 하염없이 그 자리를 지켰을 것이다. 뒤차의 경고음 소리에 정신이 퍼뜩난 나는 학교 주차장 속을 향해 차를 움직였다. 늘 주차하던 자리는 지정석처럼 비어 있었다. 오늘도 평소처럼 출근 시간에 맞춰 정시 도착이었다. 여느 날과 다름없는 하루 일과가 시작된 것이다. 쾅하고 차 문이 닫히는 소리가 넓은 주차장 속으로 퍼져 나갔다. 그때 나는 빠져 나온 몸을 다시 차 안으로 급히 집어 넣어야 했다. 오늘 아침은 여느 때처럼 아무 변화없는 쳇바퀴 속의 아침이 되어서는 아니 되는 날이었다. 오늘이 아내의 생일임을 꽝하고 닫히는 차 문소리에 바보처럼 그제서야 깨달았던 것이다. 지난 세월을 되돌아 볼 필요도 없다. 나는 이십 년이 넘는 결혼 생활 동안 아내의 생일을 한 번도 잊은 적이 없다. 미리 준비한 생일 선물은 아내가 잠에서 깨어 나기가 무섭게 아내 앞에 놓여졌고 때로는 아침을 기다리는 것이 길다 싶으면 자정의 시계소리가 들리기가 무섭게 아내를 깨워 준비한 선물을 잠으로 부시시한 아내의 눈 앞으로 내 밀었다. 그러면 아내는 나에게 '땡큐'와 '아이 러브 유'를 연발했었다. 그런데 오늘 아침은 아무 것도 없었다. 생일 선물도 땡큐도 아이 러브 유도. 그나마 오늘의 해가 지기 전에 아내의 생일임을 깨달은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출근 시간에 늦는 것으로 오늘 하루는 시작되어야 했다. 당장 아내에게 달려가지 않고는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을 것 같았다. 들여다 본 손목 시계는 다행히 아직 아내가 수업에 들어가지 않음을 알리고 있었다. 아내의 학교가 상당거리에 있긴 해도 급히 서두르지 않아도 될 시간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아내에게 미안한 내 마음은 나를 느긋하게 내버려 두지 않았다. 꽃가게에 들러 장미꽃 한다발을 사 들고 나오던 나는 이십여 미터 멀리 주차된 차를 향해 전력 질주를 하기 시작했다. 여기저기 상처난 오래된 엘리베이터가 힘이 드는 듯 끼긱거리며 천천히 3층으로 올라갔다. 손에 든 한 다발의 빨간 장미꽃이 엘리베이터 안의 연한 전등빛 아래에서 환히 빛났다. 장미꽃을 받아들고 땡큐와 아이 러브 유를 연발할 아내를 생각하니 아내의 생일을 잠시 잊었던 나의 미안한 마음은 벌써 온데 간데 없다. 문에 또렷히 적혀 있는 아내의 이름을 보며 손잡이를 돌렸다. 투석으로 쇠약해진 아내의 모습이 예상대로 그 곳에 있었다. 컴퓨터 모니터에 눈을 붙이고 있던 아내는 나와 장미꽃을 번갈아 쳐다보며 무슨 일인지 의아한 표정이었다. 아내도 오늘이 자신의 생일임을 잊고 있었던 것일까. "생일 축하해." 장미꽃을 받아든 아내의 얼굴이 장미꽃보다 더 아름다웠다. 장미꽃에 한참 눈길을 주던 아내의 얼굴이 서서히 나를 향했다. 땡큐가 없다. 아이 러브 유도 없다. 대신 눈가를 붉게 적시는 눈물만이 있을 뿐이었다. 아내의 눈물인지 장미꽃 눈물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늦었다. 빨리 학교로 돌아가 봐야겠어." 좀 더 오래 아내 곁에 머물지 못하고 나는 아내에게서 황급히 빠져 나오고 말았다. 늦은 출근이 핑계였다. 사실을 말하자면 아내의 눈물따라 나의 눈도 적셔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눈가가 붉어진 아내를 조금만 더 쳐다보고 있으면 나의 눈에서 한 두 방울이 아닌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비 오듯 흘러 나올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호흡을 크게 하고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꾹 참았던 눈물이 엘리베이터 문이 완전히 열리기도 전에 서둘러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서는 내 눈에서 하염없이 흘러 나왔다. 다행히 아무도 없는 조용한 엘리베이터 안이었다. 〈끝>

2009-05-11

[중앙신인문학상] 논픽션 부문 당선작 "귀향기"

1 “닥터 김, 미국 시민권을 포기한 자가 다시 다시 영주권 신청을 한 것은 부끄러운 일 아닙니까?” 나는 이 물음을 예상하고 있었다. 당연한 물음일 수 밖에 없지 않은가. “부끄러운 일입니다만. 저도 변명할 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 살다보면 나오는 것을 이해해 주십시요.”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니요?” “어쩔 수 없는 선택이란 누구나, 당신이라도 그 상황에서 저가 택한 선택을 했으리란 것이지요.” “글쎄요. 저 같으면 미국 국적을 포기하지 않고 어머니를 보살피는 길을 찾았을 것 같은데요. 예를 들면 어머니를 양로원에 보낸다던가…. 미국 국적을 포기해야만 한다는 이유는 변명이라고 생각됩니다.” 그가 한국의 상황, 양로원을 알 리가 없다. 그는 잠시 멈추었다가 이렇게 그의 면접, 아니 질문을 이어갔다. “저는 닥터 김이 미국적을 포기한 이유에서 상당이 반미적인 언어를 구사했고 그 언어들은 미국적을 획득했었을 적에 행한 선서의 내용과 상당히 다른 것이라고 봅니다.” “저가 쓴 국적 포기서를 읽어보셨군요. 그렇습니다. 저는 한국의 대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미국 대학생들을 가르칠 때와 다른 기쁨을 갖게된 것도 사실이고, 미국이라는 동굴의 끝까지 가본 사람으로 미국에 더 미련이 없다고 썼었지요.”나는 거기서 호흡을 가다듬고나서 이렇게 물었다. “그렇다면 저가 처음 쓴 다른 국적 포기서도 읽으셨겠군요.” 그는 서류를 뒤지면서 다른 국적 포기 사유서를 찾을 수 없다고 말했다. “그건 이상한데요. 1차 국적 포기서가 거부되었기 때문에 2차 국적 포기서를 쓴 것입니다. 2차 국적 포기서만 읽으셨으면 저의 상황을 충분히 이해하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는 내 말을 거기서 차단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저는 오직 하나의 사유서를 읽었을 뿐입니다. 유감입니다.” 그는 내가 미국 국적을 포기했다는 사실 자체가 있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잘 들으십시요. 저는 1차 국적 포기 사유서에서 정직하게 병든 어머니를 보살피기 위해서 서울의 대학으로 옮겨왔고, 그 대학에서 한국 국적으로 돌아와야 교수직을 얻을 수 있다고 해서 미 국적을 안타깝게 버릴 수 밖에 없다고 썼었어요.” “그런데요?” “서울의 미국 대사관은 저의 정직한 사유서를 거부했습니다.” “그 이유는?” “강압이나 강제에 의한 미국적 포기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이유였습니다.” “그래서요?” “서울의 대학 행정가는 어찌 되었던 미국적을 포기해야 한다고 주장했지요. 그렇지 않으면 저도, 그도 감사에 걸려 파면당할 것이라고. 그 말을 듣고 국적 포기 사유서를 소설처럼 써내려갔지요. 정직한 사유서가 거부되었으니 정직하지 않은 사유서가 나올 수 밖에 없었지요.” 그는 내 말을 처음으로 심각하게 듣고 있었다. 그는 처음으로 이 세상에 정부 관리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인생살이가 어딘가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는 것 같았다. 나는 이민국 사무실을 빠저 나왔다. 그는 9·11 사건후 신원조사가 오래 걸린다는 말을 내 뒤통수에 던지고 있었다. 나는 돌아보지 않았다. 밖에 나오니 겨울바람이 차다. 2 7년마다 얻을 수 있는 안식년에 서울의 대학으로 가 1년 가르치고 오면 그동안 쌓인 죄의식이 사라질 줄 알았다. 그래서 여기 저기 한국의 대학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쉽지 않았다. 1년기간의 방문교수던, 초빙교수던 “줄이 닿지 않으면” 모든 것이 아직도 어려웠다. “가능한 것도, 불가능한 것도 없다는 한국”이라고 한 후배는 말하며 가능한 쪽으로 희망을 가지라고 격려했다. 그래서 미국 우주항공국에 가서 1년 연구교수로 갈 준비도 했다. 과학 기술 정책이 나의 전공분야이어서 지금까지 미국 우주항공국, 미국 국립보건연구원에서 80년대, 90년대 두 번의 안식년을 가졌기 때문에 올해에도 한국에 가지 못하면 우주항공국으로 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아들을 멀리 두고 보시면서 행복하셨다. 아들이 미국에서, 세계에서 학자로 사는 모습을 보면서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살아오셨다. 그러나 상황은 달라지고 있었다. 1년 전에 아파트 문이 닫히면서 오른손 손가락 하나가 잘리는 아픔을 당했는데 상처는 아물었지만 아직도 손이 떨리고 있다는 소식이 새로운 비관적인 상황을 암시하고 있었다. 의사는 그가 일반의로서 더 이상 치료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김교수님, 이제 큰 병원으로 가서 진찰을 받아야 할 것 같아요.” 서울에서 걸려 온 전화를 받으면서 나는 심란할 수 밖에 없었다. “지금까지 외상으로 치료했는데, 상처는 아물었습니다만 어머니의 손은 여전히 떨리고 있거든요.” “알겠습니다.” 나는 허망함을 느끼고 있었다. 이제 다른 상황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1년이라도 어머니 곁에 있지 않으면 내 죄를 조금도 씻을 수 없겠다는 비애가 나를 엄습했다. 절박했다. 애절함 만큼 절박한 것은 없다. 어머니가 더 이상 혼자 살아갈 수 없으리란 막연한 비애가 나를 슬프게 했다. 언제나 “내 걱정을 말고 너 할 일을 하라”던 어머니. 미국에 와서 함께 살자는 아들의 제안은 늘 그렇게 거부되었었다. 이제 어머니의 세월은 얼마 남아있지 않음을 느끼고 있었다. 60년대 함께 공부하던 친구가 부총장으로 일하고 있는 대학에서 온 1년 초빙교수 제안을 받아드렸다. 나는 풍랑의 바다 속에서 등대의 불빛을 바라본 감정이었다. 나는 그렇게 서울에 왔다. 1968년 5월 시애틀에 내려서 지금까지 나의 삶은 하이웨이를 달리는 차륜같았다. 동료 교수가 논문 하나 쓰면 나는 두 개를 쓰고, 책 한 권 저술하면 두 권을 저술하고, 학생들의 교수평가에서 늘 1위를 놓치지 않고 살아왔다. 그동안 결혼해 아들, 딸 하나를 얻고 중산층의 동네에서 편안함 삶을 살아왔지만 그 뒤란에는 평안함이 없었다. 늘 팽팽한 긴장이 지배하고 있었다. 이민자의 삶은 늘 그런 것이라고 생각하고 살아왔다. 처음으로 나 스스로 내 삶을 돌이켜볼수 있었다. 어머니. 언제나 거기 계셨다. 갖난아이 옆에 늘 어머니가 있듯이. 집에는 늘 어머니가 계셨다. 전쟁의 페허 속에서도 어머니는 아들을 부등켜 안고 지켜주었다. 남편이 북으로 납치된 후에 어머니에게 아들은 전세계였다. 아니 우주였다. 여학교 선생님으로 아들의 공부와 성공을 기도하면서 살아왔다. 아들이 미국으로 떠나던 날 김포공항 송영대에서 “너를 태운 비행기가 하늘 끝으로 날아간 뒤에도 나는 오래 거기 그대로 서 있었다”는 편지가 아들을 보호해준 수호신이었다. 새벽마다 깨끗한 물 한 접시 웃목에 떠놓고 기도해 온 어머니. 어머니는 그렇게 살아왔다. 한국의 어머니. 아들의 성공에 걸림돌이 되지 않으려고, 성년이 된 아들이 결혼하여 그의 가정을 이루고 사는데 그에게 짐이 되지 않기 위하여 “나는 괜찮다”고 말씀하시던 어머니. 그 어머니는 주몽의 어머니, 조선의 심사임당, 그 어머니가 한국을 위대한 나라로 만들고 있었다. 1969년 여름 시애틀에서 만난 정명훈과 누이들의 어머니도 그랬다. 만 7년 만에 아들은 어머니를 찾아왔고, 그 이듬해 어머니는 손자를 받으려 아들을 찾아오셔서 6개월 체류하셨다. 다시 7년이 지난후 아들은 어머니를 찾아왔다. 어머니는 그 무렵 은퇴했다. 아들은 다시 어머니에게 미국에 오셔서 살자고 제안했지만 답은 똑 같았다. “언어가 안되고, 자동차 운전도 못하는 내게 미국은 창살없는 감옥이 아니냐.” “내 집 있고, 내 나라가 있는데 나는 여기가 좋아.” 62세의 노인이 아직 할 수 있었던 변명이 아니겠는가. 가난했던 60년대, 주머니에 70달러를 넣고 시애틀에 내려서 대학원 과정을 마치고 교수직을 얻어 테뉴어를 얻고 나서 한국을 찾아갔던 1974년까지 장거리 전화는 사치였다. 항공편지가 일주일 걸려 태평양과 미국 대륙을 건너왔고, 그 편지가 어머니와 아들을 잇는 다리였다. 세월이 가면서 전화는 자유롭게 걸리고 걸려왔지만 비행 시간은 만 24시간 걸리는 먼 거리였다. 노스웨스트로 워싱턴에서 출발, 디트로이트에서 한, 두시간 기다렸다가 다시 서울로 가는 비행기를 타면서 더 빠른 비행을 바라고 있었다. 알라스카 앵커리지에서 쉬어갈 때도 있었다. 나중에 대한항공이 워싱턴-서울 직행을 날라 14시간 비행으로 줄어들었지만 나이 들면서 긴 비행시간은 고단한 여행이었다. 1년이라도 어머니 곁에 있지 않으면 내 죄를 씻을 수 없겠다는 비애가 엄습했다 아들은 어머니가 교단에서 은퇴한 후 여름마다 서울을 방문했다. 2주, 3주 여름방학은 어머니와 아들이 견우, 직녀처럼 만나는 귀중한 시간이었다. 어머니는 32평 아파트에서 꽃을 키우면서 책을 읽으면서 국민학교, 중학교 시절 친구들을 만나면서 그들과 어울려 가끔 설악, 제주, 남해 여행, 동남아 여행을 하며 즐겁게 노년을 보내고 아들이 오면 여행사진들을 보여주었다. 가끔 동창회보에 실린 여행기를 보여주었다. 어머니와 함께 한 2주, 3주가 행복한 시간이었다. 그 시간이 늘 거기 있을 줄 알았다. 세월이 가는 것을 알면서도 느끼지 못하고 살았다. 마치 지구가 자전하는 것을 느끼지 못하고 살듯이. 그렇게 지구 위의 생물은 현기증을 느끼지 않고 살 수 있도록. 밤이 가면 태양이 떠오르고. 우리들은 아무 걱정없이 내일을 약속한다. 그러나 어느 순간이 오면 우리들은 떠나야 한다. 약속할 수 없는 시간이 오는 것을 모르고 산다. 아들의 나이 54세에 이르도록 무지한 대학교수로 살았다. 세월은 더 이상 어머니와 아들의 관계를 방관하지 않았다. 용서하지 않았다. 어머니와 아들의 관계 정립이 필요한 시간이 왔다. 허망했다. 3 서울에서 어머니를 지탱해 준 다른 축은 어머니-이모-외숙이었다. 그 삼각관계가 무너질 때 어머니를 지탱해준 다른 축은 무너지고 있었다. 어머니는 내 외할머니가 낳은 무남독녀였다. 외할머니의 오빠가 낳은 아들이 내게 외숙이 되고, 외할머니 언니가 낳은 딸이 내게 이모가 된다. 정확하게 말하면 나는 외숙도, 이모도 없다. 그냥 아저씨, 아주머니가 있을 뿐이다. 내가 철이 들어 사물을 바라볼 수 있었을 때 그리고 인척관계를 따져볼 수 있었을 때 나는 그들의 인간관계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인간관계라고 단정했다. 용산 이모처럼 다정한 이모가 없고, 청파동 외숙처럼 가까운 외숙이 없다. 그들은 동기간처럼 거의 매일 전화로 안부를 묻고 살았다. 내가 서울에 오면 이모와 외숙을 방문하고, 좋은 음식점에서 저녁식사라도 하는 일정이 잡혀 있었다. 행복한 시간이었다. 한국전쟁의 폐허에서 살아남았을 때 그들은 어머니를 찾아와 위로했고, 나를 안아주었다. 아버지를 잃은 어머니와 아들을 한없이 위로해주었다. 우리들의 생활비를 보조해 주었다. 전쟁 기간에 어머니는 시장에서 장사를 하고 살았었는데 그들은 우리들의 생존을 걱정해 주었다. 이모부가 철도청 기술자였고, 용산철도 관사에 살고 있어서 그 집을 방문한 기억도 있다. 외숙은 대법원 행정직에 그대로 남아있어서 어머니에게 끝없는 위안이 되었다. 중앙청에서 일하시던 아버지가 납치되어 가신 후 그들이 아니었더라면 어머니와 아들은 살아남을 수도 없었는지 모른다. 내가 서울로 왔던 가을학기가 끝날 무렵 12월초 이모와 이모부는 서울를 떠나는 작별의 저녁식사로 우리를 초대했다. 정확하게는 외숙이 주선한 저녁이었고, 외숙의 두 딸이 이삿집이 나간 빈 집에서 케이터링한 저녁식사를 차렸다. 가족을 미국에 두고 어머니를 보살피기 위해 돌아온 나를 외숙과 이모는 칭찬해주었고 고마워했다. 나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 저녁식사 시간이 참으로 슬픈, 그러나 아름다운 시간인 것을 깨달았다. 이 세상을 하직하는 작별의 시간에 이모는 고향으로 간다고 표현했다. 이모부의 고향이 정읍이어서 그리로 떠난다는 사실은 이제 단순한 서울의 떠남이 아니라 삶으로부터 떠남이라는 의미였다. 이모가 외숙보다 한 살 위이고, 외숙이 어머니보다 두 살 위이니 이제 그들은 작별의 시간을 소중하게 나누고 있었다. 초겨울 가로수에서 떨어진 은행잎이 노랗게 포도를 뒹구는 모습보다 더 슬픈 모습이 조용한 아파트 빈 방에 흩날리고 있었다. 겨울숲의 모습은 신록의 숲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나는 그 슬픈 변화가 하나의 과정이라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살았다. 천치가 아닌가. 그래, 사람들은 모두 천치인 대목이 있다. 지구가 자전하는 것도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처럼 나도 그렇게 살아왔으니. 어머니는 그 날 저녁 후 걷잡을 수 없이 해체되어 가고 있었다. 이모가 서울을 떠났을 때 어머니의 몸은 이미 황폐화되어 가고 있었다. 눈이 침침해지고, 그래서 책을 읽기가 힘들어지고 있었다. 바느질을 할 수도 없었다. 바늘귀에 실을 꿰메는 일을 내개 주시더니, 얼마 후 바느질 자체가 힘들어젔다. 겨울 솜이불을 새로 깔아주시던 어머니는 이제 사라지고 있었다. 그래도 어머니는 아들의 아침식사를 준비했고, 아들이 좋아하던 달걀말이 요리, 생오징어, 김, 된장국을 시금치와 함께 밥상에 올려놓았다. 병든 어머니가 해주는 아침식사를 할 적마다 눈물이 솟았다. 눈물을 보이지 않게 하는 연습도 필요했다. 이별도 연습이 필요했다. 아침마다 어머니와 아파트 주변을 산책하고 주말엔 어머니가 좋아하는 일본 음식점에도 가고, 압구정동 현대백화점 지하에 있는 식료품 점에 가서 이미 준비된 반찬도 사왔다. 옆 아파트에 살고 있던 소설가 정소성이 들려 어머니와 아들이 오붓하게 사는 집이라고 말하고 갈 때 어머니는 행복했지만 조금씩 건강에 자신을 잃어가고 있었다. 강남 일원에 있는 삼성병원에 한 달에 한 번씩 다녀올 때마다 어머니는 힘들어했다. 옥수동 전철역 층계가 높고, 일원역 층계가 높아 노인이 다니기엔 힘들었다. 미국의 전철역엔 노약자들을 위한 에스칼레이터가 운영되고 있는데, 아직 한국은 거기까지 오지 못하고 있었다. “어머니, 이제 택시타고 다니셔도 되는데.” 그러면 어머니는 택시 값이 너무 많이 나온다고 주저했다. 어머니는 경동시장에도 전철을 두 번 갈아타고 다니면서 근처의 아파트 단지 식료품상에서 사오는 것을 회피하고 있었다. 절약이 몸에 벤 어머니 습관을 고치기 어려웠다. 그러나 전철역 층계를 오르내리면서 힘들어했다. 가난했던 시절을 살았던 어머니 세대가 있어서 지금 한국은 중진국이 되었고, 그런 근검절약으로 나라가 이만큼 지탱한다고 보았다. 사치와 낭비가 경제위기를 몰고 오고 있었다. 금융위기, 외환위기가 곧 한국을 강타하고 있었다. 파킨슨 병세는 아무리 약을 복용해도 좋아질 수가 없었다. 그 약의 부작용은 심각하게 나타나고 있었다. 치매를 가속화하고 있었다. 운동신경이 마비되어 부축하지 않으면 걷기가 힘들어지고, 치매현상이 가속화되어 혼자 외출할 수도 없었다. 결국 파출부 아주머니를 쓰기로 했다. 내가 학교에서 돌아오면 파출부는 그녀의 집으로 갔고 아침이면 우리 아파트에 도착, 어머니의 보호자로 함께 시간을 보냈다. 어머니는 아직 건강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이제 아들이 부재중일 때 다른 보호자가 필요했다. 일생을 거의 혼자 살아오신 어머니가 두 사람의 보호자를 두고 산다는 사실이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아파트 단지 상가에서 지갑을 그냥 두고 나오시는 빈도가 늘어가고, 여의도 중국 음식점에서 모이는 여학교 친구들 모임에 갔다가 종로 3가 역에서 5호선에서 내려 3호선으로 옮겨타는 것을 잊어버린 사건이 발생했다. 무서웠다. 어머니의 병은 겨울저녁처럼 깊어만 가고 있었다. 파출부 아주머니는 우리 아파트에 함께 살면서 어머니와 지낼 수는 없었다. 가족이 있기 때문에. 그래서 입주가 가능한 아주머니를 찾았더니 연변족 아주머니가 왔다. 조그만 보따리 하나 들고 들어선 아주머니를 내칠 수는 없었다. 먼저 면담이라도 하고나서 일자리를 제공하려던 것이었는데 그 여자는 그렇게 입주하게 되었다. 그렇게 시작한 연변 아주머니와의 관계는 1년여, 어머니가 병원에 입원할 때까지 이어젔다. 아주머니는 식당에서 일하다 우리 집으로 왔는데 일이 힘들고 경기가 안좋아 월급도 못 받아서 우리 집으로 왔다 했다. 이미 불법 체류자였다. 연변족 사람들은 거의 모두 불법체류자였다. 1년 방문비자로 한국에 들어와 눌러앉아 있는 꼴이다. 아무도 그들을 추방하지 않는다. 동포이기 때문에.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적어도 3년이상 일해야 “투자한 돈이 빠진다”고 아주머니는 말했다. 한국여행을 알선하는 거간꾼들이 1년치 급료에 해당하는 거간비를 챙기기 때문이라고 그녀는 설명했다. 그러나 연변에서 온 아주머니는 한국어를 쓰고 있었지 윤동주가 누구인지도, ‘별 헤는 밤’이 누구의 시편인지도 모르는 여자였다. 하얼빈에서 이등박문을 저격한 안중근에 관해서도 그녀는 아는 것이 없었다. 돈을 벌기 위해서 조국이라는 데를 찾아왔지만 조국이 어떤 나라인 것을 알지는 못했다. 핏줄이라는 것이 이럴 수도 있구나. 중국의 국적을 갖고, 중국 여권을 갖고 한국에 온 사람들. 월 80만원을 받고 일했다는 아주머니에게 나는 월 1백만원 월급을 약속했다. 어머니의 병간호와 세끼 식사, 아침, 저녁 아파트 주변 산책이 일의 내용이라고 일러주었다. 나는 그녀에게 모든 것을 일임했다. 식료품점에 가서 필요한 것들을 사오는 일에서부터 어머니 목욕시키는 것까지. 겨울방학에 아주머니를 믿고 나는 버지니아 집으로 왔다. 미국에서 어머니에게 전화를 하면 어머니는 아들의 목소리를 분별하지 못하고 있었다. 간병인 아주머니가 내 뜻을 전달하게 되었다. 청각이 나빠지고, 시각이 나빠지고 있었다. 좋아하는 책을 읽기도 버거웠다. 이미 그랬다. 내가 서울을 떠나기 전에도. 매일 전화해도 어머니는 아들의 목소리를 알아듣지 못하고 있었다. 일생을 아들을 위해서 희생한 어머니가 이제 아들의 목소리를 모르고 있다. 이럴 수도 있는가 싶었다. 외숙이 지팡이에 의지해 옥수동 아파트를 가끔 방문하지만 나는 아주머니에게 의존할 수 밖에 없었다. 겨울방학은 그러나 짧게 끝났다. 어머니가 순천향 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을 옆 동네 아파트에 사는 정소성이 전화로 알려주었다. 대치동에 사는 대학동창 춘근에게 나 부재중에 어머니를 보살펴달라 했는데 이웃이 어머니 입원을 책임져 주었다. 아들이 멀리 있을 때 결국은 인간이웃이 사촌보다 가까운 법인 것을 알았다. 춘근이는 내가 미국에 유학하고 있었던 기간 자기 어머니 생일은 잊어도 내 어머니 생일을 기억했던 친구. 아들 노릇을 아들보다 더 잘했던 친구도 강남에 살고 있으니 옥수동 현대 아파트에 사는 작가보다는 한 발 늦을 수 밖에 없었다. 내게 가까운 또 한 사람은 내가 서울의 대학에서 만난 제자였다. 명희는 울진출신으로 마포구 신수동에 자취하고 있었던 학부 학생이었는데 내 처지를 동정하고 있었다. 마음이 따뜻했던 아가씨. 어느날 비를 맞고 교정에 들어서는데 우산을 받쳐주어 사제지간의 정을 따로 느꼈던 제자. 그녀는 내게 어머니를 돌보아 드릴테니 미국의 가족과 함께 크리스마스 휴가를 지내고 오라고 당부했던 아가씨. 그 세 사람을 믿고 미국에 갔지만 바늘방석에 앉은 기분인 것을 어쩌랴. 연변 아주머니가 일주일에 하루 휴일을 챙기기 때문에 은아는 하루 어머니의 간병인으로 자원봉사자가 되었다. 오히려 명희가 어머니를 진정으로 보살펴주는 간병인이었다. 아들은 아름다운 숨소리를 어머니가 잠든 방 문 앞에서 듣고 있었다 등창이 생기지 않도록 등을 마사지하는 일이라던가 병원에 모시고 가는 일이라던가. 아주머니는 돈을 벌기 위해 한국에 온 사람이지만 돈을 버는데 따른 책임감이 결여되었다. 그 여자는 노인과 한 방에서 잠을 자기를 꺼려했는데 명희는 노인과 함께 하루를 지내고 갔다. 어머니를 아들 혼자서 간호하기는 어려웠다. 목욕시키는 일, 소변, 대변을 보는 일을 누군가 돌보아주어야 하는데 아들이 하기는 참으로 힘들었다. 운동량이 부족하니 자연 변비증이 생기고, 2, 3일에 한번 관장을 하는 일은 가장 어려운 일이었다. 명희는 그래서 천사같은 여자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 세상에는 천사같은 여자가 정말 존재하는 사실을 확인하게 해주었다. 돈으로 환산할 수 없었던 인간애를 나는 나이어린 소녀, 아직 여자라고 부르기엔 어린 아가씨에서 느끼고 있었다. 1월 중순에 퇴원해서 집에서 기브스를 하고 있는 어머니를 만나게 되니 다시 눈물과 죄책감만 커지고 있었다. 어머니는 나를 보자마자 “우리집으로 가자”고 말씀하신다. 이게 우리집이라고 말해도 막무가내로 “우리 집으로 가자”고 하신다. “어머니, 우리 집이 어디에 있어요?” 물어보면 아무 대답이 없다. “어머니, 가회동 집으로 갈까요!” 아무 답이 없다. “어머니, 사천으로 갈까요.” 아무 답이 없다. 어머니의 유년시절과 외할머니 무덤이 있는 고향인가, 아니면 가회동 고가를 회상하시는 것일까. 파킨슨스병 환자들은 약의 부작용 때문인지 환상에 젖는 시간이 많아진다. 신경계통의 전문의는 그리 크게 놀라지도 않았다. 이틑날엔 “학교에 아이들이 기다리고 있다”고 가야한다면서 옷을 꺼내 입고 외출준비를 해서 “어머니, 은퇴하셔서 이제 아이들이 기다리지 않는다”고 해도 막무가내였다. 그래서 부축해서 언덕을 내려가다가 힘들어 쉬어야 겠다고 아들이 말하니 걸음을 멈추었다. 파킨슨스병 환자들은 유년시절로 돌아가기를 바라고, 어머니를 찾아가기를 바라고, 젊은 날의 교사생활로 회귀하는 추억의 낭만을 갖고 있는 환자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한강을 바라보며 어머니와 아들은 살아온 삶의 여로를 더듬고 있었다. 연어가 자기 고향으로 돌아오는 것을 축제로 만드는 강원도 양양이 있고, 연어의 회귀를 소설로 써 성공한 작가도 있다. 조국을 떠난 이민자들이 한 순간도 잊을 수 없었던 조국은 무엇일까. 아들은 병든 어머니 옆에서 “어머니, 아닐까?” 반문했다. 겨울 냉기가 스민다. 다시 어머니를 부축해 아파트로 돌아왔다. 어머니가 있는 나라가 조국이다. 유년시절이 있는 나라가 조국이다. 친구들이, 선생님들이 있는 나라가 조국이다. 추억이 있는 나라가 조국이다. 종로가 있고, 비원이 있고,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가 있고, 중·고등학교가 있고, 대학이 있는 나라가 조국이다. 그러나 조국의 근원과 시작은 어머니. 그 어머니의 신경계통이 마비되어가고 있음을 옆에서 바라보는 비애는 혹독했다. 자꾸 내 집으로 가자고 말씀하시는 어머니의 집은 어디에 있습니까? 어머니의 유년이 있는 외가입니까, 아니면 이대(二代)가 비어있는 시댁입니까 도둑 고양이들이 일가를 이루고 있는 은행나무 집에 들어가 살수가 없습니다 아들이 아직 이역을 방랑하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눈물의 여왕이신 어머니 눈에 눈물은 보이지 않고 아들의 눈에 눈물이 보입니다 유년시절 들녘을 찾아가는 눈빛이 서러울 뿐입니다 어머니는 부정맥이라는 진단도 받았다. 병이 다른 병을 동반하면서 해체되는 육체와 정신을 마비한다. 숨소리가 생명이다. 숨을 거두면 사람은 죽는다. 아들은 아름다운 숨소리를 어머니가 잠든 방 문 앞에서 듣고 있었다. 숨소리는 아들을 안도하게 만들었고, 위안을 주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어머니의 숨소리 심장이 불규칙으로 뛰는 어머니가 내게 준 가장 아름다운 위안은 한 밤 숨소리입니다. 어머니의 방 문에 내 귀를 대이고 듣는 숨,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리를 아시나요 몸의 균형을 잃고 응접실 차이나 캐비넷 유리창에 머리를 부딪쳐서 다시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을 때 목련화가 피었다 떨어지고 진달래가 한창이었다. 조금이라도 미리 알았던들 피할 수 있었던 사고였지만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식이 되었다. 연변 아주머니를 탓할 수도 없다. 순식간에 일어난 사고였으니까. 그 후 어머니는 더 이상 움직일 힘도 없었다. 누어있다가 식사 시간이 되면 조금 음식을 들게 했지만 스스로 식욕을 잃었다. 아니 음식을 삼킬 힘도 잃었고, 물을 마실 힘도 잃었다. 식욕이 아니라 삼키라는 뇌의 기능이 완전히 마비되었다. 노인의 위에 구멍을 뚫어 호스를 박아 액체 음료를 공급하는 마지막 수단을 의사는 내게 말했다. 코에 호스를 넣어 액체 음식을 공급하는 방법을 삼성병원 응금실에서 터득했지만 그것은 오래 가지 못했다. 노인은 집에 둘아오자마자 호스를 빼버렸기 때문이다. 소처럼 살아가는 삶의 질은 유지할만한 가치가 없었다. 아들 혼자 울고 있었다. 그날 밤에도 연변 아주머니는 혼자 응접실에 나와 태연하게 연속극을 보고 있었다. 한 편의 비극과 희극이 한 아파트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4 병이 깊어가고, 그렇게 봄학기가 오고 있었다. 나는 1년후 도저히 어머니를 두고 미국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나는 대학에 방문 교수가 아닌 전임 교수직을 구했다. 내 개인적인 사정을 알게 된 대학은 전임 교수직을 원하면 미국 시민권을 버려야 한다고 알려왔다. 나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공개 교수채용 공고가 일간지에 나가고, 나는 필요한 서류를 준비하기에 바빴다. 왜 그리 필요한 서류가 많은지? 그래도 가짜 박사가 넘치는 대학을 이해할 수 없었다. 모교에 가서 학부, 대학원 졸업증서, 성적증명서, 미국 대학의 대학원 졸업증서와 성적증명서, 그동안 가르처온 대학에서 재직증명서, 추천서, 그리고 지난 5년 발표한 연구논문의 복사본 만들기가 내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미국에서는 이력서 한 장으로 대학 교수직을 얻었는데, 한국은 대학교수를 원하는 사람들을 모멸하는 문화를 갖고 있었다. 이력서 한 장에 그동안 살아온 삶이 다 들어있는데 왜 이 나라는 불필요한 서류준비로 시간과 돈을 낭비하게 하는가. 미국 대학처럼 이력서·서류 전형으로 세 사람을 선정, 인터뷰에 초청해서 면담하고 공개 강의를 하게 해서 한 사람을 정하면 되는 일을 처음부터 산더미같은 서류를 챙기도록 하니 시간낭비가 아까웠다. 예를 들면, 나는 모교에 가서 성적증명서를 떼어왔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졸업증명서를 따로 떼어와야 한다고 대학 사무직원이 친철하게 알려 주었다. 성적증명서 안에 졸업년도와 학위가 명시되어 있는데도. 대학이 서로 수수료 수입을 늘리려는 의도인지 알 수 없었다. 나는 먼 길을 다녀오다가 전철 안에서 혼자 미친사람처럼 박장대소를 했다. 이 나라에 희극적 요소가 상당이 들어있다. 낭비가 참 많은 사회가 한국이구나. 낭비는 부유한 사회가 가질 수 있는 사치인데 이 나라는 그리 부유한 사회도 아닌 것 같았다. 종이낭비, 시간 낭비, 시간이 금인데. 대학 도서관에는 미국 학술지가 다 구비되어 있지 않아서 여의도 국회도서관에 가서 내가 발표한 학술논문들을 복사해왔다. 내가 발행한 책들은 아마존닷캄으로 주문해서 마감날에 맞추었다. 산더미 같은 서류를 모두 제출하고 났더니 긴 한 숨이 쉬어졌다. 대학 교수직이 한국사회에서 그래도 괜찮은 직업이라 그래서인지 내가 응모하는 자리에 수십명이 몰려들었고, 나는 1차, 2차 심사를 거처 면접과 공개강의를 끝냈다. 대학총장은 심사위원회가 추천한 두 사람중 한 사람을 최종 선발할 권리가 있었다. 그 과정은 길고 긴 터널이었다. 그러나 병든 어머니를 위해 나는 모든 것을 감수했다. 나이가 문제였다. 55세의 원로교수가 지망했다는 사실이 대학가 뉴스였다. 내가 임용되면 ‘기적’이라고 모두들 수군대고 있었다. 모두 30대 박사학위 소지자들이었고 한 사람이 40대 초반의 국책연구소 연구원이었다. 나이가 장애일 수 있지만 절대적인 장애물이 될 수 없다고 나는 주장했다. 나이든 만큼 학자적 성취를 했다고 나는 주장했다. 그리고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내가 할 일이란 기다림이었다. 가을학기가 그렇게 끝났고, 겨울방학이 기다림의 절정이었다. 채용이 되면 봄학기부터 전임교수로 발령이 나온다. 나오면 나는 미국 국적을 포기해야 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러나 할 일 없이 어머니 옆에만 있다는 사실도 나를 괴롭혔다. 얼마나 더 살지 모르는 어머니, 그러나 내가 할 일이 있으면서 어머니 옆에 있고 싶었다. 마침내 김진현 총장이 만나자는 전갈이 왔다. “김교수님, 축하합니다. 일단 김교수님이 1순위로 올라왔고 나는 총장으로써 김교수를 선임할 것입니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하게 할 것이 있어서 뵙자고 했습니다.” “말씀하시죠.” “우리대학에 전임으로 오시면 바로 미국 국적을 버려야 합니다. 불편하시겠지만 그것이 한국의 법적 현실입니다. 세계화를 떠들고 있어도 아직 국수주의적 민족주의가 판을 치는 나라이지요. 감사에 걸리면 저나 김교수나 모욕을 당하게 됩니다.” “그 규정을 알고 있습니다. 저는 이 대학이 제게 교수직을 주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저의 노모가 병 중에 계시고 저는 어머니 옆에 있기 위하여 미국 국적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연세대 송자 총장이 2중국적으로 어려움을 당한 후 시회적 문제가 되었고, 한국 대학이 이 문제에 민감합니다.”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총장님, 이 대학에 누를 끼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도 내 개인적인 사정을 알고 있었다. 그는 이 대학을 도시라는 문제에 초점을 맞추었고 내가 전공한 과학, 기술, 공공정책이나 환경정책이 중요한 부분이니 이 대학을 위해 전심을 다해 가르치고 연구하라고 당부했다. 그 날 저녁에 집에 돌아와 어머니에게 이제 전임교수가 되어 어머니 옆에 있게 되었다고 말씀드리니 반가워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알아듣고 있다는 표현은 내가 받아드린 것이다. 이미 말을 잃은지 오래. 그러나 어머니의 색바랜 어머니, 내 외할머니의 사진을 눈 앞에 보여드리고, “이 분이 누구야?” 물으면 “내 어머니”라고 짧게 답하고 만다. 그리고 이 세상이 귀찮다는 표현을 짓는다. 어머니의 이마에 마지막 키스를 했을 때 아직 어머니의 따스한 체온이 남아있었다 5 그래도 세월을 가고 오고 있었다. 봄학기가 왔다가 갔다. 봄은 어느새 여름이 되고, 여름은 길게 그림자를 드리우고, 가을은 짧게 왔다가 간다. 그 가을에 어머니는 폐렴증세를 보이더니, 결국 입원하게 되었다. 교대 근처에 살고 있던 시동생, 나의 숙부가 문병 와서 “이제, 오늘, 내일”이라고 불길한 한마디를 남기고 갔다. 병세를 진단하는 나이가 있는 분이 짐작할 수는 일이라고 보았다. 아침 저녁, 휠체어에 앉혀 아파트 주변을 한바퀴 둘고 들어오는 사이에 감기증세가 왔고, 감기는 폐렴증세로 번젔다. 가을 미풍에도 낙엽은 떨어지고, 어머니는 낙엽처럼 떨어지고 있었다. 10월까지 어떻게 견뎌냈는지 기억할 수도 없다. 11월 4일 아침 119 구급차에 실려 어머니는 한양대 병원 응급실에 실려갔다. 그 전에는 택시로 삼성병원까지 가고 왔었는데 명희가 119 구급차를 전화로 불러주었다. 그 날 저녁 의사들은 운명의 시간을 준비하라고 전했다. 알부민 주사가 기적적으로 어머니의 생명을 연장해주었다. 그렇게 3월이 왔다. 병실에 들리면 눈이 마주쳐도 아무 표현이 없는 어머니. 그 전에는 눈이 마주치면 어머니는 한동안 아들을 응시했는데 그나마 의식이 꺼져가고 있었다. 4개월 병원생활 속에서도 몇 번 더 운명의 시간이 왔다고, 준비하라는 의사의 전화를 받았지만 어머니는 4개월 연명했다. 한 밤 중에도 병원에 쫓아가던 슬픔이 옥수동과 행당동 언덕의 병원 사이에 깔려있다. 한국의 병원은 세계 열한번째 나라 병원이라고는 믿을 수 없었다. 환자 측에서 간병인을 구해야 한다. 연변 아주머니는 병원에서 잠을 자는데 익숙하지 않아 어머니를 떠났기 때문에 나는 새 병원 간병인을 구해야 했다. 그러나 새로 구한 여자도 일주일에 하루는 휴일이 필요했다. 그럴 때마다 내가 간병인 자리를 지키던가, 명희가 지킬 수 밖에 없었다. 미국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병원의 풍경이었다. 응급실의 여유가 없어서 복도에서 하루를 기다리다가 저녁 무렵 복도에서 코에 호스를 박아주던 한국 최고의 삼성병원을 내 생애에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입원을 하려 해도 빽이 있어야 한다는 나라. 대학 친구 춘근이가 그나마 한양대 병원 응급실로 가게 도와주었고, 입원할 수 있도록 도와 주었다. 어머니의 온 몸에 이 케이지 전류를 통하도록 해 놓고 숨이 넘어가는 시간을 기다리던 슬픔의 한 덩어리였다. “숨이 멎었습니다.” 간호원이 알려준 마지막 메시지였다. 어머니의 이마에 마지막 키스를 했었을 때 아직 어머니의 따스한 체온이 남아있었다. 영안실로 옮겨졌고, 3일후 아버지의 빈 무덤을 열고 어머니의 관이 들어갔다. 보은 속리산 기슭에 어머니는 남편의 무덤을 만들었고, 그 안에 아버지의 유품을 넣어두었다. 내가 열 살 때 마지막 본 아버지의 최후를 아는 이는 없다. 간간히 압록강변 요양소에서 숨졌다는 소문도 나돌았지만 확인할 길은 없었다. 남편에 대한 아내의 도리를 어머니는 그렇게 했다. 그 자리에 어머니가 들어갔다. 20대 초반 두 분이 결혼, 초야의 신방으로 들어가듯 어머니는 그렇게 아버지의 무덤으로 사라젔다. 한 시대가 그렇게 사라젔다. 일본 식민지시대에 태어나 성장, 젊은 나이에 해방의 감격을 맛보고, 곧 전쟁의 비극을 경험했던 아버지, 어머니의 시대는 그렇게 속리산 자락의 무덤 속으로 들어갔다. 하관은 한 시대의 하관이었다. 그 위에 흙을 덮었다. 이제 더 이상 오열할 수도 없었다. 내 눈에는 더 이상 눈물이 흐를 것 같지 않았다. 한 삽 흙을 떠 넣고 나는 그 자리를 떠났다. 삼우제에 다시 속리산을 찾았고, 나는 그렇게 한국을 떠났다. 6 아내가 내 영주권을 신청해주어 나는 영주권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미국 이민국 어느 관리도 나와 어머니의 관계를 모른다. 알려 하지도 않는다. 미국 국적을 버린 사람을 이해할 수 없는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들을 설득하고 싶지 않다. 있는 그대로 진술하고 서술하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 나라로 돌아온 내가 다시 영주권을 신청하고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이 미국 국적을 취득했었을 때보다 더 부끄러웠다. 돌아가라면 돌아가고 싶다. 한국에서 태어나 성장해 미국에 와서 1977년 미국 국적을 취득했었을 때 나는 20년 후에 내 앞에 어떤 일들이 일어날까 짐작하지 못했다. 나를 낳아주시고 키워주신 어머니, 이 세상보다 아들 하나 바라보고 살았던 어머니가 언젠가 숨을 거두리라는 간단한 사실도 모른 채 학자연하고 살았다. 이민국 사무실에서 나오니 주차시간이 지났다고 벌금 쪽지가 자동차 유리 위에 끼어 있었다. 나는 내 집에 돌아와 청와대로 한 장의 편지를 쓰고 있었다. 한국 대통령 귀하 절대 다수의 사람들이 하나의 나라에서 살다가 갑니다. 그러나 그런 시대는 지나가고 있습니다. 세상은 변했고, 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을 자기 집으로 알고 사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다국적 기업이란 말이 이제 일상용어가 되어있습니다. 이름있는 기업이면 다국적 기업입니다. 한국의 삼성, 현대, LG가 한국의 대표적 다국적 기업입니다. 중소기업도 다국적화되어가고 있습니다. 세계화가 국경의 의미를 희미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래서 한국에서도 2중 국적의 허용이 논의되고 있고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필자는 28년을 미국에서 살다가 병든 어머니와 몇 년을 함께 하기 위하여 미국 국적을 버리고 한국 국적으로 돌아갔습니다. 서울의 대학이 다른 선택을 주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국가 공무원법이라고 말했습니다. 1999년 필자는 그것을 받아드렸고, 지금 필자는 그에 따른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이 글은 2중 국적을 허용하기 바라는 마음으로 씌어지고 있습니다. 필자와 같은 희생자가 더 이상 나오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한국정부가 2중국적을 허용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필자는 1968년 유학생으로 미국에 와 공부를 마치고 한국에 돌아갈 수 없어(반체제 문필인) 미국에서 대학교수로 살다가 1998년 초빙교수로 서울의 대학으로 갔습니다. 1999년 전임교수가 되었을 때 필자는 미국 국적을 버리고 한국 국적을 회복하는 조건을 충족해야만 했습니다. 서울의 미국 대사관에서는 필자의 정직한 진술에 “강요에 의한 미국 국적 포기는 받아드릴수 없다”는 판결을 통고해왔고 그래서 필자는 ‘소설적’ 이유를 만들어 다시 써서 미국 대사관에 제출했고, 그 결과 미국 국적을 ‘어렵게’ 상실했고, 한국 국적으로 돌아갈 수 있었고, 서울의 대학에서 가르칠 수 있었습니다. 2년후 어머니는 유명을 달리하셨습니다. 필자는 미국으로 다시 돌아와 미국 국적을 갖고 있는 저의 아내는 필자의 영주권을 신청했습니다. 미국 연방수사국의 신원조회가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기다림의 고통이 만만치 않습니다. 테러리스트와의 전쟁이 이방인의 신원조회를 오래 끌고가며 어렵게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20여년 세월을 미국의 모범시민으로 살았었지만 지금 미국 정부는 필자를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듯합니다. 영주권을 얻을 때까지 필자는 28년 부어놓았던 사회보장 혜택을 받을 수 없고, 병이 나도 의료보험의 혜택을 받을 수 없습니다. 미국 국적을 갖고 있으면 아프리카 밀림 속에 있어도 사회보장 혜택이 주어지지만 미국 국적을 포기한 필자의 죄값이 이렇게 크다고 말합니다. 어머니와 3년을 함께 살기 위하여 필자는 죄값을 달게 지불하고 있습니다. 서울의 대학이 필자에게 미국 국적을 포기하지 않게 배려했더라면 치루지 않아도 될 죄값을 지불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국의 대학교수가 되기 위하여 미국 국적을 버리고 났더니 외국학자들이 한국의 국립대학 교수로 채용되는 소식을 일간지에서 읽으며 한국의 불공정 거래를 탓했지만 그때 상황에서 필자는 선택이 없었으니 누구를 원망하겠습니까. 당시의 한국 법은, 지금도 전근대적인 민족주의 문화의 유산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때에도 권력과 가까운 사람들은 정부공사의 고위직에 있으면서 미국 국적을 유지하고 있었으니 법의 한계 안에서 산 필자의 소시민적인 무력함을 탓할 수 밖에. 이민1세는 어쩔수 없이 조국과 선택한 나라를 방황하며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조국에서 태어나 유년시절, 청년시절을 보내고, 2년의 군복무를 끝내고 외국에 유학생으로 나와 일하다 아들이 조국에 가서 일할 수 있었던 기회는 오직 미국국적 포기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외국으로 나와 영주권을 기다리는 ‘처량한 신세’가 되어 영주권을 다시 받을 때까지 외국여행도 불가능한 ‘영어의 몸’이 되었으니 한국정부는 필자와 같은 이들에게 선처를 내리기를 기대합니다. 미국 국적박탈이 한국에 돌아가 일할 수 있는 유일한 조건은 아니었으면 합니다. 군복무를 피하기 위해, 한국의 세금을 피하기 위해 외국국적을 취득하는 이들에게 선처를 베풀라고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수많은 선의의 사람들이 불필요한 손해를 보는 일은 없으면 좋겠습니다. 재외동포의 2중국적 논의에 한국인이 깊이 사려해야 할 사실은 이민1세들은 조국을 떠나서 살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민 2세, 3세들은 이미 그들이 태어난 나라에 귀속하게 됩니다. 지나친 민족주의적 감정이입은 변화하는 세상으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있지 않나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세계화가 급속히 진행되고 있습니다. <끝>

2009-05-07

[중앙신인문학상] 단편소설 부문 가작 "네 자매"

목구멍을 통과하지 못한 슬픔은 괴음으로 몸을 빠져나와 거실에 뒹굴었다. 대강 보아도 삶이 초라할 것 같은 얼굴들은, 어떤 무명 화가의 분노가 담긴 스케치처럼 강퍅하고 무미건조했다. 제구실을 못하는 표정들 때문에, 괴음이 거실을 점령한 이유를 누구도 알아낼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네 자매는 지금껏 견뎌낸 그 어떤 절망보다도, 가장 가혹한 절망이 만들어낸 슬픔과 공황상태에 놓여있었고, 거기다 반평생의 한 까지 들쑤셔져, 세상에서 들을 수 없는 요상한 소리들을 만들어내고 있었던 것이다. 슬픔의 제공자인 막내는, 괴음을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신경질적으로 일어나 TV를 켰다. 한국 유명 연예인의 죽음이 화면 가득 채워져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발을 구르며, 그녀의 죽음을 슬퍼했다. 하지만, 영정사진 속 그녀의 해맑은 웃음은, ‘죽음의 티켓을 받은 여러분, 두려워 마세요. 그리고 어서 이 곳으로 오세요. 이 곳은 새하얀 꽃들과 푸른 초원이 펼쳐진 정말 아름다운 곳이랍니다. 이 곳엔 슬픔도 아픔도 없어요. 나를 보세요. 이렇게 웃고 있잖아요’라고 말하는 듯했다. 뒤를 따르며 까무러칠 듯 울어대는 사람들과 그녀의 죽음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듯했다. 그녀의 하얀 목도리와 하얀 미소, 그리고 수천 송이 하얀 꽃들은, 그들의 발버둥을 의미없는 과장된 행위로 보이게 했다. 어쨌든 TV 화면은, 세상 모든 사람이 울고 있으니, 당신 또한 울어도 된다는 면죄부를 네자매에게 주었고, 비로소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목구멍을 활짝 열어 슬픔을 토해내게 했다. “엉엉엉, 아이고 아이고, 엄마, 엄마,” 저마다 토해내는 방식은 달랐지만, 통곡의 끝은 없을 것 같았다. 막내만이 단정하게 TV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었다. “좋겠다. 저 여자는 제 목숨을 자기 의지로 거뒀네.” 막내의 한 마디는 절망의 핵을 터트렸고, 우리는 머리카락을 쥐어뜯고, 가슴을 치고, 거실바닥을 긁으며, 그 절망을 표현했다. “딩동 딩동 딩동….” 경쾌한 기계음이, 멈출 수 없을 것 같았던 통곡을 한 순간에 멈추게 했다. 집 주인인 막내가, 문 쪽을 흘낏 쳐다보더니, 이내 시선을 TV로 돌렸다. 우리의 통곡도 계속 이어졌다. “딩동 딩동 딩동 딩동….” 초인종이 연이어 울렸다. 무엇이던 세 번이 넘어가면, 전하고자 하는 진실에 가시를 돋게 한다. 동생이 거칠게 일어나 문을 열었다. “Are you ok? What happen?” 옆집 사는 백인 노인이 부인과 함께 놀란 눈을 말보다 먼저 안으로 들이밀었다. “I am ok. We watching tv drama. Sorry.” “Oh, I understand.” 백인 노인은 자신과 아내도 슬픈 드라마를 보면 눈물을 흘린다는 둥, 한참을 떠들다, 계속 시청하라는 말을 남기고, 문까지 닫아주는 친절을 보였다. “미친놈 오지랖도 넓어.” 작은 언니가 닫힌 문을 향해 눈을 흘기며 말했다. 백인 노인의 방문은, 우리의 울음을 울음 끝도 남기지 않고 멈추게 했다. 우리 모두는 TV 속의 죽음으로 슬픔을 이동했다. 망자의 남동생이 가슴 깊숙이 사진을 안고 흐느끼고 있었다. 남자이기 때문에, 소리 내지 못하고 울음을 삼키는 모습이, 더욱 애처로운 장면을 연출했다. 우린 우리들 가슴에 안긴 막내의 영정사진을 떠올리며, 또 다시 통곡했다. “언니, 나, 영정사진 무엇으로 하지? 저 여잔 영정사진도 예쁘네.” 이미 화면 속으로 들어간 막내가 힘없이 말했다. “야, 너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우리가 울어주니까, 네가 정말 내일 당장이라도 죽는 줄 알아?” 작은 언니가 소리 질렀다. “나는 친구도 없고, 남편도 없는데, 박 서방, 나 죽으면 와주기나 할까?” “미친년, 요새 세상에 암이 병인 줄 알아? 암 걸리고도 팽팽하게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리고 그 놈은 또 왜 찾아?” 그래도 작은 언니는 사태의 심각성을 나와 큰 언니보다 덜 감지한건지, 동생의 말을 놓치지 않고 받아쳤다. “나는 화장해서 훨훨 뿌려줘. 록키산맥 가장 높은 곳에 올라가서. 뿌릴 땐, ‘사람과 시간과 바람소리’ 틀어줘. 아주 크게. 애들 말고, 내가 이 세상에 한 순간 머물렀었다는 증거가 또 뭐가 있을까. 저 여잔 이름도 남겼고 필름도 남겼는데. 세상에! 나는 뭘 하며 산거야 지금껏. 사는 게 죽는 거라는 걸, 왜 생각 못하고 살았지?” 막내는, 행운보다 더 쉽게 찾아올 수 있는 죽음을, 삶에서 제외시킨 자신의 미련함을 힐책했다. “암을 정복한 사람은 정신력이 강한 사람들이란다. 그러니 너도 정신 줄 놓으면 절대 안돼. 지금껏 살아온 것처럼, 야무지고 독하게, 네 몸에서 쫓아내버려. 그래도 얼마나 다행이니? 왜, 평생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정기검진을, 계획도 없이 갑자기 하게 됐겠어? 너 살리려고 그런 거야.” 큰언니가 애걸하듯 말했다. “우리 아이들한테 뭘 해주고 죽을까? 애들 아빠한테 아이들 뺏어서 벌 받았나봐. 내 자존심 살리겠다고 천륜을 갈라놓았으니? 그렇다면 신은 누구 편인거지? 간통 한 자를 벌해야지, 정숙하고 모범답안처럼 산 나를 벌하고 있잖아?” 막내는 항상 성경책을 손에 쥐고 있는 큰언니를 향해 물었다. 하지만 큰 언니는 고통스런 눈으로 대답할 뿐 이였다. ‘아니란다. 사랑하는 동생아. 주님의 뜻이 있을 거야. 너를 벌하는 게 절대 아니야, 기다리자, 기다려보자’라고. 죽음은 오디션에서의 ‘땡’ 소리와 같다. 기회를 잃은 자와 얻은 자의 대화는 절대 합쳐질 수 없었다. 막내와 우리의 대화가 그랬다. 한 달 전, 가구점을 운영하던 둘째언니가 파산했다. 몽땅 털어 넣고 시작한 가구점이 2년도 안돼 문을 닫게 되었다는 소식은, 우리에게 가공할 충격이었다. 무엇보다 작은 언니가, 소리 소문 없이 그렇게 힘든 시간을 보냈다는 것에 자책하고 괴로워했다. 미안함과 막막함으로 연락도 못하고 있을 때, 작은 언니로부터 전화가 먼저 걸려왔다. “오늘 밤부터 내일 아침까지 금식이야. 꼭 지켜야 돼.” 금식기도의 참여로 면죄부를 받은 우리는, 금식 뿐 아니라 철야기도까지 했다. 우리의 합심기도가 가구점의 문을 활짝 열어주기를, 간절히 간구했다. 다음날, 작은 언니가 우리를 데려간 곳은 종합병원이었다. “뭐야? 너 왜 우리를 여기 데리고 온 거야?” 겁 많은 큰 언니가, 어떤 일이 일어나도 심장만은 지키겠다는 듯, 거친 손을 심장에 갖다대며 물었다. “언니!” 나는 더 이상의 절망적인 소식은 전하지 말아달라는 간절함을 담아, 작은 언니를 나지막이 불렀다. 막내는 이 상황을 빨리 해명하지 않는 작은 언니에게, 화가 잔뜩 나 있었다. “야, 야 놀래지들 마, 그런 새가슴으로 이 험한 세상을 살고 있으니, 우리가 이 모양 이 꼴인 거야. 우리 한 번도 건강검진 안 해 봤잖아. 물론 그럴 형편도 못 됐지만. 이번에 우리 사총사 건강 검진하자. 건강하게 오래 살아야지. 우리가 누구야? 옛날 용산 땡땡거리 주름잡던 골목대장들이잖아. 가진 것 없이, 부모 없이 살아왔으니, 목숨만은 세상사람 그 누구보다, 가장 오래 붙들고 있어야 하지 않겠어?” 작은 언니는, 너무 가냘파 자신의 의도가 전혀 전해지지 않는 불끈 쥔 주먹을 내밀며 말했다. 건강 검진 받는데, 운명과 투쟁까지 선포하는 언니의 허전한 마음이 전해졌다. “비싸잖아? 얼마나 비싼데. 언니 미쳤어?” “어차피 파산이야. 남은 카드로 기분 한번 내려고.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일이 무엇일까? 많이 생각했거든. 여행을 갈까 했는데, 각자 생활도 있고 해서, 그것보다 이것이 더 필요할 것 같아서, 이걸로 했어. 내가 이 짓 안하면, 우린 병으로 죽어도 왜 죽는지, 언제부터 죽음을 달고 살았는지, 모를 거야. 하자, 하고, 건강하게 남은 인생 즐겁게 살자.” 작은 언니는 언제나 그랬다. 어릴 적부터 우리보다 생각과 행동이 앞섰다. 섭섭할 만큼 무관심하며 자신만 챙기다가도, 굵직굵직한 결정은 도맡아 처리했다. 큰 언니가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해, 부모님은 지독한 가난만 남겨놓고 한달 간격으로 돌아가셨고, 우린 큰 언니를 엄마 자리에, 작은 언니를 아빠자리에 앉혔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작은 언니는 지금껏 자신의 삶보다 우리의 삶을 먼저 챙겼고, 중요한 결정을 주도했다. 우리 집에는 항상 학교에서 주는 급식 빵이 저장되어 있었다. 또한 학용품이며 수건, 비누 등 생필품이 모자람 없이 쌓여있었다. 작은 언니는 새들이 먹이를 나르듯, 생필품을 집안으로 날랐다. 소풍날이나 운동회 날, 어린이날이면 언니는 더욱 바빴다. 공짜로 배급이 시행되는 어떤 곳이건 달려가, 수 시간씩 줄을 서서라도 기어코 작은 가슴 가득, 물건을 안고 집으로 돌아왔다. 나의 자존심, 큰 언니의 부끄러움, 막내의 철없음을 대신하기 위해서, 작은 언니는 어쩔 수 없이 남자가 되어야 했다. 남자들과 주먹싸움으로 세력을 장악하고, 부모의 부재와 가난이 만들어낸 선생님들의 지독한 괄시와 편애에도, 거침없이 저항하며 투쟁했다. 운동회 날에는 제일 앞에서 목청 터져라 우리의 이름을 부르며 응원했고, 어떤 행사건 우리를 끌어다 맨 앞에 세웠다. 지금껏 작은 언니는, 두려움으로 인해 우리가 뒤집어씌운 ‘아비 부’의 의무를, 처절히 수행하고 있는 중이였다. 그랬기 때문에, 이번 계획 또한 낯설진 않았지만, 언니의 표정에 무언가 단호함이 엿보여, 걱정이 앞섰던 것이다. “싫어. 난 안해.” 큰 언니가 몸을 돌려 차 쪽으로 걸어갔다. 작은 언니가 큰 언니를 쫒았고, 그 뒤를 막내와 내가 따랐다. 큰 언니가 몸을 돌린 이유를 우리 모두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겨워서 그래. 참 열심히도 산 우리 자매. 그런데 누구 하나 내 놓으란 듯, 잘살지 못한 게 억울해서 그래. 나까지 이렇게 됐으니, 속상해서 그런다구.” “내 기분 모르겠어? 언닌 동생들 몸이 제대로 돌아가고 있는지, 어떤 문제가 있는지, 걱정도 안돼? 그러다가 동생들이, 무슨 병이라도 걸려 치료도 못 받고 죽으면, 원통해서 살 수 있겠어?” "나는 화장해서 훨훨 뿌려줘 록키산맥 가장 높은 곳에 올라가서" 작은 언니 말에, 거친 언니의 발걸음이 멈췄다. “하자. 어차피 없어지는 돈이야. 이제 내가 뭘 더 해 줄 수도 없어. 응? 언니.” “그래 하자. 하지만 내가 낼 거야. 네 말대로 동생들 건강 챙기는 건 큰 언니인 내 몫이야. 너는 언제까지 나를 바보로 만들래? 내가 변변치 못해서겠지만, 나한테 상의라도 했어야지. 왜 금식하는지, 어디로 끌려오는지도 모르고, 이 자리에 섰어야 하겠니?” 큰 언니는 눈물까지 글썽였다. 우리는 어린 나이에, 어떻게 엄마와 아빠 자리에 큰 언니와 작은 언니를 구별해 앉혔는지, 그 현명함에 감탄하며 살고 있다. 큰 언니는 지나칠 정도로 감정적이지만, 작은 언니는 섬뜩할 만치 이성적이기 때문이다. 자리가 바꾸어졌더라면, 성격도 바꿔졌을까? 모두의 머리가 주저없이 흔들릴 만큼, 가능성은 희박했다. “미안해 언니. 내가 생각이 짧았어. 해주고 싶은 생각이 앞서다보니.” “가자, 가서 샅샅이 검사 맡자, 잡초처럼 살아온 우리한테, 감히 어떤 병균이 들어와 자리잡을 수 있겠는가마는, 그래, 속 시원히 해보자.” 말을 끝낸 큰 언니가 다시 거친 발걸음을 병원으로 옮겼다. 우리는 그 뒤를 또 다시 뒤따랐다. “비쌀 텐데. 큰 언니가 무슨 돈이 있다구.” “얼마 정도 될까? 우리도 보태자.” 막내와 나는 숨죽인 소리를 주고 받으며 잔걸음을 옮겼다. 병원에 도착한 언니는 가방을 열어 카드 세 장을 내밀었다. 하나로는 한도가 안 되리라는 계산을 한 것이다. 작은 언니가 재빨리 자신의 카드를 간호원 손에 쥐어줬다. “아니요, 이것으로 결제하세요.” 큰 언니의 성난 목소리에 간호사가 어리둥절해하며 작은 언니의 카드를 내려놓았다. “이걸로 하세요.” 작은 언니가 또 다시 카드를 간호사 손에 쥐어줬다. “왜 들 이러세요. 저기 가서 의논하고 오세요. 왜 여기서 이래요. 카드로 내면서.” 간호사가 날카롭게 쏘아댔다. 작은 언니가 “뭐 이런 게 있어?”하며 자신의 카드를 그녀 앞에 던졌다. 싸움이 날 것 같자, 절대 물러나지 않을 것 같던 큰 언니가 당황해하며 자신의 카드를 손에 넣고, 작은 언니를 뒤로 잡아끌었다. 그렇게 해서 작은 언니의 카드가 미끄러지듯 카드기에 그어졌다. “내가 계산해서 둘째 줄 거야.” 큰 언니는 못내 마음이 편치 않은 듯 중얼거렸다. “그래 언니 우리 각자 것 계산해서 작은 언니 주자. 그러면 되지?” “얘들이 왜 이래, 내가 낼 거라니까.” 큰 언니는 금방이라도 한 바가지 쏟을 듯, 그렁그렁 눈물을 매달며 화를 냈다. “알았어, 알았어. 큰 언니가 내. 고마워 언니.” 모든 풍요를 완벽히 소유할 수 없는 것이 세상 이치라면, 우리에겐 재물이나 행운이 없는 대신, 차고 넘칠 만큼의 우애와 사랑이 있었다. 그건 아주 어릴 적부터, 서로 뭉쳐야 살 수 있다는 것을 직접 몸으로 터득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누군가 몸살이라도 나면, 모두 모여 그 집에서 밤을 지새웠고, 자신 입에 들어가는 것보다 언니나 동생 입에 들어가는 것을 더 만족스러워했다. 우리들이 누릴 수 있는 소박한 행복을 지키기 위해, 어떤 희생도 두려워하지 않았던 것이다. 잠깐의 소요는 지나가고, 우리는 즐겁게 검사를 받기 시작했다. 작은 언니는 열 다섯 가지가 되는 정밀검사를 신청해 놓았다. 각자 다른 검사를 시작으로 돌아가며 검사를 받았다. 마주칠 때마다 서로의 상태를 확인하고, 이상 없음을 당연해 하며, 승리자처럼 미소를 주고 받았다. 검사가 끝나고, 의사는 우리를 함께 불러 앉혔다. 그리고 성적을 불러주듯, 한 명씩 건강상태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시험은 잘 보았지만, 혹시나 하는 불안감으로 성적표를 기다리듯, 가슴이 조였다. 큰 언니는 류마티스 증상이 있으니 치료를 해야 한다고 했다. 그 외에는 아주 정상이라며 ‘정상’이라는 단어에 힘을 주었다. 언니의 논바닥처럼 갈라진 혈색으로 보아, 비정상이 정상이지 못한 것에 아쉬워 하는 듯했다. 작은 언니는 맥박수를 포함한 모든 수치들이, 일반적인 기준보다 약하지만, 별 문제점은 없다고 했고, 나 역시, 쓸개에 작은 혹이 있지만 염려할 정도는 아니라고 했다. 문제는 막내였다. 막내 차례가 되자, 그의 심각한 표정의 이유가 막내로 인한 것이라는 듯, 역설적인 온화함으로 표정을 전환하며, 차분히 입을 열었다. “자궁경부에 종양이 발견됐습니다. 정밀 검사를 해봐야겠지만, 상태로 보아 암일 확률이 큽니다. 어떤 방법의 치료가 가능할지, 검사 결과가 나온 후에 결정하기로 하고, 지금 바로 정밀검사를 합시다.” 소리가 귓속까지 전달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귀는 소리를 차단했다. 의사는 어항 속의 금붕어처럼 그저 입을 뻐끔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대신, 귀에서는 지독한 이명음이 계속됐다. 큰 언니는 얼굴에 회칠을 해놓은 듯했고, 작은 언니는 표독한 얼굴로 의사를 노려보고 있었다. 당사자인 막내는, 올 것이 왔다는 표정으로, 진료카드를 넘겨다보고 있었다. “무슨 말인가요? 그럴 리가 없어요.” 큰 언니가 부들부들 떠는 손을 겨우 합장시켜 가슴에 올리며 물었다. “정밀검사 해 주세요. 아주 정밀하게.” 쇠꼬챙이 같은 목소리로, 하지만 침착하게, 작은 언니가 말했다. 불행의 바람이 불어오면, 작은 언닌 숨을 참는 고통을 견디고라도, 바람이 지나가길 기다린다. 하지만 큰 언닌, 입을 벌려 그 바람을 전부 들이쉬고, 끝도 없이 비틀거린다. 나는 막내의 몸에서 희망이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막내 손을 힘껏 쥐었다. “너무 성급하신 것 아닌가요. 정밀검사도 해보지 않고 암이라고 단정짓고 있잖아요, 모든 병은 마음에서 오는 거라는 것 쯤은 잘 알고 계실 텐데, 확실하지도 않은 확률로, 환자에게 공포감을 주고 있지 않습니까. 암이 아니면, 암이 절대 아니겠지만, 제 동생이 검사 결과 나올 때까지 겪게 될 정신적인 충격, 생각해 보셨나요?” 작은 언니는 제 정신을 차린 듯, 침착함을 벗어버리고 언니 특유의 공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병을 감추는 시절은 지났습니다. 암 같은 건 본인이 빨리 알고, 낫겠다는 의지와 신속한 치료가 중요한 겁니다.” 의사는 공격을 받았다는 것에 자존심이 상한 듯,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래서 암이라고 확정짓는 겁니까? 아닐 수도 있잖아요?” 작은 언니는 의자를 뒤로 밀치고 일어나, 그를 내리칠 것처럼 한 걸음 다가섰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자궁경부암은 골반까지 전이되지 않으면, 자궁만 절제하면 되고, 연세도 있고 하니 크게 심려하지 않아도 될 겁니다.” 당황한 의사는, 자기 나이의 여인들 앞에서 세우고 싶었던 권위를 내던지고, 내뱉은 말을 추스르기에 바빴다. “막내 재검사 받아야 한다잖아.” 나는 작은 언니를 밖으로 끌어냈다. “아무 것도 결정난 것 아니야, 막내야, 마음을 다잡고 먼저 나가지 말자, 설사 암이라고 하면, 이 언니들이 가만있겠니? 네 몸에서 암 병균들이 처참하게 말라죽게 만들 거야. 언니들 믿지?” 큰 언니는, 막내의 발아래 무릎 꿇고, 자신 입에서 빠져나온 말이 도망이라도 갈 듯, 한 마디, 한 마디 꾹꾹 눌러가며, 어디로 튈지 모르는 막내의 감정을 붙잡으려 애를 썼다. “오십대 오십이야, 부정적인 오십을 먼저 생각하면 안돼, 긍정적인 오십으로 부정적인 오십을 쫒아내. 우린 잡초야. 어떤 제초제로도 우릴 죽일 수 없어.” 작은 언니가 단호하게 말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막내옷의 단추를 풀고 있었다. 재검사를 끝내고 나온 막내의 얼굴은 도리어 평온했다. 막내를 낙천적이고 밝은 성격으로 세상에 내보내 준 것에, 처음으로 부모에게 감사했다. 하지만 가까스로 붙잡고 있던 희망은, 한 낮의 태양아래 저항도 못하고 녹아내렸다. 병원 문을 나선 우리는, 사막 한가운데 버려진 것처럼, 갈 곳을 찾지 못했다. 어디로 가야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어찌해야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동생을 위로할 수 있는 단어가 없다는 것에 화가 났고, 배가 고픈 건지, 아니면 충격으로 위가 뒤틀리는 건지, 알 수 없는 모호함이 짜증났다. “나이가 들면 생각의 뿌리에 접근하지 못해, 그게 두려움으로 인한 자의적 현상인지, 아니면 신이 그렇게 만들어 놓았는지 모르지만 말이야. 우리는 울 때 울지 않고, 웃을 때 웃지 않는, 감정 장애자들이 되는 거야, 그런데, 한 가지 더 왕성해지는 게 있어. 식탐이야 식욕. 조각난 욕망들이 그 쪽으로 모여드는 거지. 우린 그 마지막 욕망에 충실해야 돼, 그리고 사랑해야 돼. 절대 먹고 싶은 것을 참으면 안돼, 알았지?” 막내는 언제나 이렇게 말했었다. 삶에 지친 언니들이 끼니라도 거를까봐, 이뤄 논 것 없이 아귀처럼 먹는 것에만 신경 쓰는 스스로를 부끄러워 할까 봐. 하지만, 어제 저녁부터 굶고, 오후 세 시가 지나가는데도, 막내는 평상시처럼 언니들 먹을 것을 챙기지 않았다. 허기가 맹렬히 고개를 들며, 절망까지 덮쳤다. 속이 느글거리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소리 나지 못하도록 있는 힘을 다해 배에 힘을 주었다. 언니들도 그런가, 세심히 살폈지만, 배가 고파 창백한 건지, 충격으로 인한 건지 알 수 없었다. ‘배가 고프다니, 배가 고프다니… 동생 말대로 나는 감정의 장애자인 거야.’ “언니, 배고프다. 떡 보쌈 먹으러 가자.” 작은 언니가 말했다. 아무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왜들 이래, 우리 엄청나게 배고프잖아, 막내가 죽어? 막내 너 배 안고파?” “고파, 누가 먼저 밥 먹자고 하나, 기다리고 있었어. 언제나 내가 먼저 먹자고 했잖아. 이젠 안 그럴 거야. 언니들 위장 언니들이 챙겨.” ‘아, 다들 배가 고팠구나.’ 그때서야 나는 배에서 힘을 뺐다. 식당에 도착해 삼겹살을 시킨 동생은, 짜증날 정도로 얇게 편 떡에, 삽겹살을 올리고, 그 위에 파김치와 마늘 그리고 매운 소스를 듬뿍 올려 한동안 게걸스럽게 먹기만 했다. 그저 귀엽게만 보이던 동생의 입이, 그토록 커다랗고 탐욕스러운지 그때 처음 보았다. 먹어도, 먹어도, 어딘가의 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처럼, 막내는 포만감을 느끼지 못한 듯했다. 동생의 입이 잠시 쉴 틈도 없이, 우리는 먹음직스러운 쌈을 동생에게 연거푸 안겼다. 우리는 동생 입에서 새어 나올 슬픔을, 꾸역꾸역 떡보쌈으로 막고 있었던 것이다. “그만들 해. 암으로 죽기 전에 배 터져 죽겠어. 나한테 해 줄 말들이 그렇게도 어? 뭐가 그렇게 당당치들 못해? 이집 삼겹살 전부 동내고 가겠네.” 동생의 핀잔에, 어릴 적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놀이라도 하고 있는 것처럼, 저마다의 동작이 재빨리 멈춰졌다. 그리고 슬그머니 손에 든 것들을 내려놓았다. “그래? 네 배가 이제 불렀다 이거지? 그럼 이제 우리도 배터지게 먹자. 언니 먹어, 셋째 너도 먹고.” 작은 언니는 막내 입에 들어가다 만 것을 큰 언니 손에서 빼앗아, 자신의 입 속으로 밀어 넣었다. 언제나 어정쩡한 상황을 무마시켜 주는 작은 언니가 고마웠다. 하지만 그것이 마지막 보쌈이었다. "무슨 말인가요? 그럴 리가 없어요" "정밀검사 해 주세요. 아주 정밀하게"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라는 막내의 말을 흘려버리고, 우리는 막내 집까지 따라 온 것이다. ‘가엾은 것, 혼자되어 오기와 악다구니만으로 세상 버텨 온 것도 억울한데, 이게 무슨 날 벼락이야.’ 차라리 이렇게 쏟아내고, 막내와 함께 신을 저주하고, 직무유기한 부모님을 원망하고 싶었다. 하지만 터를 잡은 절제된 감정은, 이런 원초적인 감정 폭발을 허락하지 않았고, 이유는, 험난한 인생의 반복, 혹은, 오래된 좌절로 인한 충격의 자정작용이었다. “암은 모르면 그냥 지나간다고도 하던데, 내가 검사를 괜히 하자고 했나봐.” 작은 언니가 울음 끝을 참지 못하며, 혼자 말처럼 중얼거렸다. “그게 무슨 말이야? 되로 막을 것, 말로도 막지 못하는 게 병인데. 천만다행이지 미리 알았으니.” 이미 노안이 시작된데다, 퉁퉁 붓기까지 한 눈으로 인해, 사물의 초점을 맞추기 힘든 듯, 큰 언니는 연신 눈을 비벼대며 말했다. “야, 그 TV 꺼버려.” 작은 언니가 계속되는 장례행렬의 반복된 화면으로 인해, 동생의 슬픔에 몰입할 수 없다는 듯, 짜증을 냈다. 나는 얼른 일어나 리모콘을 눌렀다. 영정 사진 속에 있는 연예인이, ‘이건 완벽한 연극입니다’라며, 환하게 웃고 있는 장면이었다. “가만 있자, 내가 먼저 죽으면, 언니들하고 얼마나 헤어져 있어야 하는 거지? 언니들 평균수명까지 악착같이 살 거야? 내가 없는데도? 평균수명이 팔십이라고 하니까, 큰 언니는 이십년, 작은 언닌 이십 오년, 셋째 언닌 삼십년. 많이도 남았네. 정말 내가 너무 일찍 죽는 거네. 왜 이렇게 평균수명이 길어진 거지? 그러고 보면 웰빙 타령도 헛짓 하는 거야. 우리 조상들은 모두 웰빙식품 먹고 살았잖아. 그런데도 환갑이면 잔치했는데, 지금은 농약이니 뭐니 해도, 수명이 한없이 늘어나잖아. 의학과 과학의 발전이야, 그러니 너무 먹거리에 신경 쓰지 마, 죽을 팔자면 나처럼 이렇게 허망하게도 죽으니까.” “너 말 잘했다. 그래, 놀라운 의학의 발전이지. 네가 걸린 암쯤은 아무 것도 아니야.” “내가 이십년 전에 뭘 했지? 직장생활 했네? 즐거웠나? 아니, 즐겁지 않았어. 특별한 일도 없었고, 뭐 죽도록 사랑한 사람도 없었고, 사랑이라는 가면을 쓴 동정에, 어리석게도 내 인생을 던져버린 실수나 저지르고, 배시시 웃어볼 추억도 없고. 앞으로 이 삼 십년 더 산다고 특별한 일 있겠어? 그냥 이렇게 사는 거겠지. 억울하지도 않아. 못쓰고 죽을 만큼 벌어논 돈도 없으니 배 아플 일도 없고, 자식들도 베타맘처럼 키웠으니 당당하게 서 있을 거고, 남긴 것이 없으니 치고 박고 싸울 일도 없을 테고, 도리어 우리처럼 뭉치겠지? 가끔 언니들이 들여다 봐 주면되고. 무덤까지 함께 들어간다고 울어댈 남편이 있는 것도 아니고, 아주 쌈박하네, 어떻게 이렇게 간결하게 살았지? 이렇게 될 운명인지 알고 산 것 같지 않아?” 속마음이 정말 어떤 걸까. 실제로 저렇듯 죽음을 초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걸까. 막내의 지나칠 만큼 차분한 감정과 말투는, 우리에게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라고 강요라도 하고 있는 듯했다. “아이고 인물 났네. 암 선고 받고, 내 동생처럼 쿨한 여자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 “쿨하지 않을 것도 없잖아, 안 그래 언니? 다 죽을 거잖아. 시기가 조금씩 다를 뿐이지. 억울한 건 내 목숨 내가 거두지 못하고 뒤통수 맞았다는 거야, 미리미리 준비하지 못하고 지각한 것처럼 뛰어가야 하잖아.” “이리와 폼 잡지 말고. 이제부터 언니가 하는 말 잘 들어.” 큰 언니가 동생의 공허한 말들을 허공에서 끄집어 내렸다. “일단 검사결과를 보자. 너도 들었지만, 상황이 안 좋으면 자궁을 들어내면 돼. 애 낳을 것도 아닌데, 우리 나이엔 아무 필요 없는 자궁이야. 너무 앞서나가 소설 쓰지 말자, 더한 병들도 완치되는데 이까짓 것 아무 것도 아니야. 상황이 심각했으면, 당장 입원하라고 했을 거야. 맞아, 가만히 생각해보니 입원하라는 말은 없었잖아? 너도 그동안 아무런 증상도 없었고. 돌아가신 엄마가 네가 아프기 전에 미리 알려 주신 거야. 치료하라고. 엄마가 우리 넷 중에 너를 제일 예뻐하셨거든?” “그러니까 나를 제일 먼저 데려 가시려나보지.” “야, 언니가 말하면 들어.” 날카로워진 감정을 숨기지 못하며 작은 언니가 소리 질렀다. “왜 소리 지르고 난리야 너는.” 큰 언니도 소리쳤다. 억장이 무너지는데, 어떻게 좀 해보라며 비명도 못 지르고, 어떻게든 혼자 수습하려 비틀거리는 동생, 그런 동생에게 변변한 말 한마디 건네지 못하는 무능한 나. 그래서 나는, 작은 언니처럼 소리를 지를 수도, 큰 언니처럼 자분자분 막내를 달랠 수도 없이, 침묵만을 고집했다. “언니, 종이와 펜 좀 갖고 와.” 동생은 나한테 갖다 줄래? 가 아니라 갖고 오라고 명령했다. 그건 죽음을 가까이 둔 자의 특권이었다. “뭘 하게?” “정리 해야지. 내가 하고 싶은 것 적을 거야. 먹고 싶은 것, 더 사랑하고 싶은 것, 용서받고 싶은 것들 있잖아. 나한테 상처받은 사람들에게 용서도 구하고. 원수도 갚고 가야지. 죽도록 뛰어왔는데, 결국은 끝도 보이지 않는 절벽 앞이고, 나에겐 그냥 뛰어내려야하는 선택만이 주어졌다면, 기분이 어떨 것 같은지 궁금하지? 기분 같은 건 없어. 도리어 살아 오면서 이렇게 명확한 적이 있었나 싶을 만큼 정리가 잘돼. 타고난 수명의 반 정도 되서, 사람들을 이런 죽음의 기로에 의무적으로 서게 한다면, 그 후의 삶은 아주 선하고 겸손할 거고 욕심 없는 삶이 될 거야.” “죽음은 사람들이 어찌해볼 영역이 아니야.” 작은 언니가 모처럼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적어봐라.” 나는 아직 며칠이 남아있는 달력을 찢었다. 찢겨진 며칠은 정말 아무 것도 아니다. 주머니에 굴러다니는 잔돈 몇 푼과 같다. 요즘 우리 앞에 있는 시간이 그랬다. “언니, 커피도 한 잔 타.” 큰 언니가 나에게 얼른 시키는 대로 하라는 눈짓을 보냈다. ‘저게 자기만 죽나.’ 얼마나 인간이 이기적인지. 깍듯하게 언니 대접 받아왔던 습관이 깨지자, 동생의 죽음이 화두인 이 상황에, 자존심이 꿈틀대다니 말이다. “샌드위치라도 만들까?” 부끄럼을 숨기기 위해, 동생에게 다정하게 물었다. “그럴래? 그럼 양배추 썰어 넣고 계란에 풀어서, 왜있지? 우리 한국 갔을 때 명동거리에서 먹었던 샌드위치? 그거랑 똑같이 해. 버터 듬뿍 넣어 빵 구워.” 끝까지 명령조였다. 그래도 동생의 주문으로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다. 나는 동생이 원하는 맛을 살리기 위해, 이년 전, 거센 늦가을 바람 속에서 샌드위치를 만들던 억센 여인의 손을 떠올렸다. 그녀의 손이 어디로 갔었는지, 무엇이 들려졌었는지를, 곰곰이 떠올렸다. 그 때 동생은, 매서운 바람을 맞으며, 두 개를 먹어치웠었다. 샌드위치 같은 간단한 음식을, 같은 재료로, 같은 맛을 낼 수 없다는 것. 그건, 수 십 년을 살아왔음에도, 매번 허우적거려야하는 안타까움과 같았다. 이것이 동생에게 해주는 마지막 음식? 자꾸 불경스럽게 앞서 나가는 생각을 잘라내기 위해, 채썰어야 하는 양배추를, 잔인할 만큼 토막내고야 말았다. 결코 위로되지 못할 말과 표정으로, 죄인처럼 동생 앞에 있지 않고, 각자 어디론가 숨어들어, 마음껏 통탄하는 것이 차라리 나을 것 같았다. 막내가 커다란 달력 위에 힘있게 써내려가는 의미 없는 단어들을, 언니들은 심각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보지 마.” 동생이 명령했다. 재빨리, 작은 언니는 소파에 기대 눈을 감았고, 큰 언니는 카펫 위에 떨어진 먼지들을 집어 올렸다. 가끔 고개를 들고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는 동생의 눈은, 죽음으로의 여행에 대한 호기심까지 담고 있는 듯 반짝거렸다. 사인분의 샌드위치가 만들어질 때까지도, 동생의 쓰기는 끝나지 않았다. 샌드위치가 동생 앞에 내려져도, 쓰기는 계속됐다. 동생은 두껍고 약간은 번질거리는 희고 넓은 지면에서, 많이 채울 수 있다는 넉넉함과, 무엇으로 채워야 하는지에 대한 안타까움을 동시에 느끼는 듯했다. 막내는 하고 싶은 일, 즉 행동을 위한 기록이 아니라, 다만 그것을 기록으로만 남기려는 듯, 작은 기울어짐도 없는 고딕체로, 또박또박 써내려가고 있었다. 커피향기는 온기를 쫓아 우리를 벗어나고, 버터가 빵의 숨구멍을 완전히 막았을 때, 막내의 기록은 멈췄다. 막내가 샌드위치를 빨리 입 속으로 집어넣어 주기를, 나는 조바심으로 기다렸다. 식게 되면 막내가 원하던 맛을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여인의 샌드위치를 맛있게 먹었던 이유가, 갓 후라이팬에서 집어 올려진 데 있다는 사실을 막내는 기억하지 못할 거며, 더구나 이미 자신의 미각이 슬픔과 좌절로 인해 유기되었다는 것도, 모를 것이기 때문이다. 쓰기를 멈춘 막내가, 한 손에는 빼곡히 채워진 달력을, 다른 손에는 샌드위치를 집어 들었다. 샌드위치의 모양이 어떤지, 양배추가 어떻게 썰려졌는지,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비로소 두 언니도 샌드위치를 집어 들었다. “언니, 그 맛이 아니잖아. 그렇게 간단한 것도 못 만들어?” 한 입 깨어문 동생이, 인상을 찌푸리며 투덜댔다. “식어서….” “그만둬. 언니는 항상 변명이야. 자신이 잘못한 거는 하나도 없어. 설탕을 약간 뿌려야지.” “설탕이 들어갔었나?” “그래 셋째야, 그때 그 아줌마는 설탕을 약간 집어넣더라.” 큰 언니가 더 이상의 말의 번짐을 막기 위해 동생 편을 들었다. “못 먹겠네. 맛이 없어. 커피가 식었네. 따뜻한 걸로 갔다 줘.” 작은 언니가 다시 일어나려는 나를 주저앉히고, 부엌으로 갔다. 그렇게 심통을 부려서라도, 정신을 허물어뜨리지 말아주기를, 우리는 바라고 있는 것이다. “뭐 다른 것 먹고 싶은 것 없니?” 작은 언니가 냉장고를 열며 막내에게 물었다. “글쎄, 아주 맵게 떡볶이가 먹고 싶긴 한데. 떡이 없어.” 큰 언니가 다시 일어나려는 나의 무릎을 내려 누르고, 자신이 가방을 집어 들었다. “사러 가게?” 막내가 태연스럽게 ‘사러 갔다 와’ 라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래, 맛있게 해줄게. 오뎅도 넣을까?” “마음대로.” 큰 언니는 무릎을 완전히 펴지도 못한 채, 절뚝거리며 문을 향해 걸어갔다. 내가 도망가고 싶었지만, 나는 큰 언니를 도망시켰다. 작은 언니가 커피를 들고 동생 앞에 앉았다. 동생이 한 모금의 커피를 입에 담고, 종이를 작은 언니에게 내밀었다. 한참을 읽어 내려간 후, 언니의 입에서 나온 말은 ‘미친년’이었다. 나는 차갑게 식은 샌드위치를 꾸역꾸역 입 속으로 밀어 넣었다. 막내가 종이보기를 강요하지 않는다면, 영원히 보고 싶지 않았다. “자 읽어봐 네 동생의 소망사항.” 빼곡한 글씨 뒷면은, 뭉크의 ‘절규’였다. 작은 언니는 자신의 비명을 들으라는 건지, 아니면 동생의 비명을 들으라는 건지, 그림 쪽을 내게 내밀었다. ‘눈도 좋지 않은 큰 언니는 지금 어디를 가고 있을까.’ "이제, 삶보다 죽음과 더 가까운 동생이 갑자기 사치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림을 보니 나도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1. 남은 내 인생만 생각하기. (이것엔 세 줄의 검은 밑줄이 그어져 있었다.) 2. 내가 벌어 논 돈, 내가 다 쓰고 가기. 3. 사고 싶었는데 비싸서 못 샀던 것들, 기억해내서 사기. 4. 다른 남자와 적어도 열 번 섹스하기. 5. 카지노에 가서, 행운에 목매지 말고, 무조건 질러보기 6. 개고기 먹어보기 7. 낚시 해보기. 8. 유럽 가는 크루즈 간판 위 달빛 아래서, 왈츠 추기. 9. 록키산맥 가장 높은 곳에서 세상 내려다보기. 10. 정민 엄마 뺨때리기 11. 세 언니 부려먹기 12. 꿔준 돈 모두 받아내기 (언니들 포함). 13. 아이들과 정 떼기. 14. 바이올린 배워 한 곡이라도 연주하기. . . . 30. 죽는 날, 내가 정하기. “너 지금 장난하니? 셋째야, 우리 괜히 벌벌 떨었나봐 애 앞에서.” “장난이라니?” 동생이 발끈했다. “삼십년 두고 해도 될 일을, 몇 달, 아니 며칠 만에 해치워야 될지도 모르는데, 장난 이라니?” 장난은 아니다. 심각하면 어김없이 왼쪽눈썹 끝이 샐쭉 올라가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었다. 유난히 진하고 숱이 많은 막내 눈썹은, 약간만 모양이 변해도 금방 표시가 났다. “써 놓고 보니, 내가 하고 싶은 것이 이렇게도 많았어. 제대로 해 본 것도 없고.” 이제, 삶보다 죽음과 더 가까운 동생이, 갑자기 사치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 이제 나한테 꿔간 돈들 모두 내놔야해. 그래야 빨리 정리될 수 있거든.” 동트기 전 겨울 하늘의 단정한 표정을 만들어내며, 막내가 말했다. “언니들은 나보고 돈, 돈, 돈, 한다고 핀잔했지, 그러면서 많지도 않은 푼돈을 언제나 나에게 꿔갔고. 나는 그 푼돈을 언니들에게 꿔 줄 때마다, 잔돈 부스러기 같은 언니들 인생이 서러워 울었어. 어쩌면 나는, 언니들에게 돈을 꿔주기 위해 악착같이 쓰지 않고 모았는지도 몰라. 얼마 모이면 언니들 어디 데리고 가야지, 무엇을 사줘야지, 어떻게 하면 언니들이 행복할까? 아비 없는 내 자식들보다 더 신경을 썼어. 믿던지 말던지.” 언니들 속에 묻혀 버린 자신의 정체성을, 죽기 전에 찾고 싶은 것이었을까. 막내는 어제의 막내가 아니었다. 막내 입에 담길 말들 또한 아니다. “그래, 그래.” 작은 언니는 동생의 말에 추임새를 넣으며, 힘겹게 큰 언니의 자리를 대신했다. 평심을 깨고라도 우리들 속에 자신이 존재했었다는 것을 알리고 싶은, 막내의 처연함에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돌아올 때가 지났는데도 큰 언니는 오지 않았다. 평상시 같으면, 제일 먼저 수선을 피웠어야할 막내는, 한 번도 큰 언니를 들먹이지 않았다. 도리어 걱정을 하는 우리를 향해, 눈으로 핀잔을 건넸다. ‘자, 나를 걱정해줘. 가슴이 찢어지도록 나를 걱정해야 돼. 밥도 먹지 말고, 잠도 자지 말고, 각자의 머릿속엔 나만 존재해야 돼. 언니들은 당연히 그래야 돼.’ 그러기를 동생은 원했다. 그래서 우리는 대놓고 큰언니를 걱정하지 못했다. 얼굴과는 반대로, 두 귀는 문 쪽을 향해 활짝 열려, 바람에 농락당하는 나뭇잎 소리까지 끌어들였다. “그래, 이것을 모두 너 혼자 해볼래?” “어떻게 나 혼자 해. 언니들이 함께 해야지. 당연한 것 아니야?” “음, 그럼 남자와 섹스 하는 것, 이거는?” “언니.” 동생은 종이를 집어던지며 소리 질렀다. “기껏 죽음 앞에서 해보고 싶다는 것이 이건가 싶어서 하는 말이야, 이것아.” 그 때 큰 언니가 발로 문을 밀며 들어왔다. 바람이 심하게 불었는지, 숱도 없는 파마머리가 수십 마리 새들이라도 품을 듯 부풀어 있었고, 노안의 눈을 얼마나 부릅떴는지, 흰자위에 붉은 수채와 물감이라도 엎질러 놓은듯했다. 언니는, 넘치는 슬픔을 비닐봉지에 옮겨 담았는지, 손가락마다 비닐봉지가 걸려있었다. 재빨리 뛰어나가, 대중없는 언니를 나무라며, 모조리 자신의 손으로 옮겼어야 할 막내는, 큰 언니를 힐끗 한 번 쳐다본 후, 다시 자신의 글을 음미하며 읽어 내려갔다. 좋지 않은 기억력으로, 바람에 날리는 지푸라기처럼, 그 넓은 매장을 돌아쳤을 것을 생각하니, 울컥 설움이 솟아올랐다. “막내가 좋아하는 것 전부 사오느라 늦었어.” 비닐봉지 안에는 내가 모르는 것이 많았다. 나는 막내에 대해 무엇을 기억하고 있을까. 막내가 저렇듯 써내려가지 않았다면, 그 애의 상처가 무엇인지, 무엇에 갈급해하는지, 알 수 있었을까. 봉지 안에서 꺼내진 물건들은, 언니에게서 빠져나온 슬픔을 나에게 집어넣고 있었다. “언니, 마켓 청소해주고 왔어?” 농담이라 느낄 수 없는 말투로 작은 언니가 물었다. 우리의 말은 답답하고 찐득한 슬픔이 점령하고 있었다. 큰 언니는 대꾸 없이 막내에게 미소 지은 후, 곧바로 부엌으로 들어갔다. 시래기처럼 바싹 마른 입술은, 오가며 얼마나 울었는지,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었다. “언니 계란도 넣어줘.” 언니의 부스스하고 안정되지 못한 행동에, 작은 보상이라도 받은 건지, 아니면 그로 인해 더 심통이 난건지, 분간할 수 없는 목소리가 부엌으로 날아왔다. “왜? 이왕이면 라면도 넣어 달라지.” 작은 언니 또한, 동생의 행위를 비꼬는 건지, 아니면 맛을 더하기 위한 팁을 주려는 건지, 애매모호한 어감을 부엌으로 던졌다. 감당할 수 없는 충격은, 도리어 인간들을 단순하게 만든다. 오로지 그 충격으로 인한 감정에만 충실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에겐 아직 ‘동생=죽음’ 에 대한 충격이 없었다. 다만 죽음에 통상적으로 따라다니는 슬픔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그래서 각자의 말에, 자신을 베어내지 못한 감정들이 살아 꿈틀대고 있었다. 나는 큰 언니를 따라 부엌으로 갔다. 부엌은 가슴 높이의 칸막이로 거실과 구분되어졌기 때문에, 동생의 미세한 표정까지 눈에 들어왔다. 아직 바깥바람을 털어내지 못한 언니의 손에서 떡을 뺐고, 엉덩이로 큰언니의 허리춤을 밀어, 거실로 가라는 신호를 보냈다. 언니는 고개를 흔들었다. 나는 다시 한 번 언니의 허리춤을 세차게 밀었다. 떡을 내려놓은 언니가 냉장고 문을 열려고 했다. 나는 얼른 냉장고 손잡이를 먼저 점령했다. 그리고 내가 하겠다는 의지를 전달하기위해 고개를 끄덕였고, 떠나길 명령하며, 세차게 거실 쪽으로 머리를 휘저었다. 인간에게 차라리 언어가 없었다면, 지구 곳곳이 이렇듯 성이 나 있지 않을 거란 생각이, 순간 들었다. 감정의 바닥까지 긁어내 언어로 만들어내면서도, 인간들은 아쉬워하고, 답답해하고, 억울해하며, 소금 뿌려진 지렁이처럼 온몸을 뒤틀고 있지 않는가. 마지못해 거실로 향하는 언니의 얼굴은, 초생달보다 창백하고 여렸다. 지금 이 집안에 입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막내 뿐이었다. “내가 박하고 결혼하려고 했을 때, 언니들이 막았어야 돼.” 겨우 마음을 가라앉히고, 소파에 않기 위해 엉덩이를 낮추는 큰언니를 향해, 막내는 불판이라도 밀어넣듯 말했다. 큰 언니는 재빨리 엉덩이를 다시 세우고, 얼굴을 창 밖으로 돌렸다. “어린 내가 사람을 알아야 얼마나 알았겠어. 나보다 더 산 언니들이라도 그놈의 인간성을 헤집어 옥석을 가렸어야지. 그저 무조건, 응 응. 귀찮고 짐이 되는 동생, 하루 빨리 남의 어깨에 올려놔버리고 싶었던 거지. 내가 그놈만 만나지 않았었다면, 이런 병도 걸리지 않았을 거야. 내가 그놈 때문에 오죽 속을 썩었게. 내가 애들한테 강파르게 구는 것도 그 놈 때문이야. 언니들은 나보고 아이들한테 정스럽지 못하다며 지겹게 말했지? 언니들이 그래야 하는 내 속을, 한 번이라도 들여다보려 애쓴 적 있어? 아이들이라면 끔직한 언니들은, 도리어 자신들과는 다르게 태어난 모양이라며, 혀나 찼지. 그리고, 아무리 우리가 먹고살기에 급급했더라도, 나는 공부를 잘했으니까, 나만이라도 대학을 보내 전문직업인으로 키웠어야지. 언니가 셋이야. 어떻게 셋이 힘을 합쳐 동생 공부 하나 못 가르쳐? 그저 함께 뒹굴자는 사고방식이야. 언니들은 공부를 못했으니까, 공부 잘한 내가 느꼈던 절망감을 알기나 할까? 지혜와 야망이 있었더라면 그렇게 했었을 거야. 그렇게 해서, 나를 변호사나 의사로 만들어 신분상승을 노렸어야 해. 도대체 언니들이 트이질 못했어. 숨겨진 먹이는 도대체 찾을 생각도, 노력도 하지 않아. 언니들한테는 보이는 것만이 세상이고, 존재하는 거야. 물론 그것조차 능력이 닿지 않아 이렇게 살지만 말이야. 언니들은 그런 삶을 나한테도 강요했어. 언니랍시고 동생이 설치는 꼴을 절대 보지 못했잖아. 자신들처럼 지지궁상으로 살아라. 운명에 역행 하지 말고, 남편하고 자식에게 희생하며, 때 되면 밥 차리고, 남편을 하늘같이. 이조시대에 태어났어 야 돼, 언니들은. 이게 뭐야? 내놓으라 하는 인맥도 학맥도 없이, 그렇다고 돈도 없이, 우리 아이들이 어떻게 세상을 우리와 다르게 살아갈 수 있겠어. 소도 언덕이 있어야 비비는 건데, 마냥 우리 타령이겠지.” “야!” 결국 참다 못한 작은 언니가 소리를 지르자, 큰 언니가 황급히 몸을 돌려 가로막았다. 나에겐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아니 들리지 않은 척했다. 나는 동생 입맛에 한 치의 부족함도 없는 떡볶이를 만들 뿐이다. “언니들은 항상 나를 끌고 다녔어. 목줄 맨 강아지처럼. 언니들과 떨어져 내 시간, 내 생활을 즐기고 싶은데, 그럴 수 없었어. 그러면 언니들이 슬퍼하니까. 지겨워 그 처량한 얼굴들. 더 늦기 전에 무언가를 시도해봐야 한다고 밤마다 다짐하지만, 날이 밝으면 다시 언니들과 섞여버려. 일대 삼이잖아. 똑똑한 언니들 같으면 싹수가 아니다 싶으면, 칼같이 박 서방과의 관계도 일찍 정리해줬어야지. 내가 그만 살고 싶다는데, 나한테 대단한 허물이라도 있는 것처럼, 울고불고 난리치더니, 결국 시간만 낭비하고, 서로 저주까지 퍼부으면서 헤어졌잖아. 헤어진 후에는 또 어떻고? 새 생활을 찾게 돕기는커녕, 자신들 손에 있는 목줄을 더 잡아당겼지? 애당초 이민오기 싫다는 나를, 혼자 놔둘 수 없다며 끌고 오고, 애 낳고 싶지 않다는 내게 애 낳는 한약이나 들이대고. 언니들은 태어난 환경에서 벗어나려거나, 그 환경을 증오하는 대신, 그것을 운명이라고 받아들이며 철저히 인생을 그 속에 끼워 넣은 거야. 나는 싫은데, 환경에서 벗어나고 싶은데. 언니들은 내 팔과 다리에 족쇄를 채우고, 나를 벗어나지 못하게 했잖아. 내가 언니들 앞에 순종해야만 언니들은 웃고 행복해 했어. "자, 눈물부터 그렇게 쏟아내 봐 안으로 삼키지 말고. 다 토해내" 남편한테 순종해라. 아이들한테 희생해라. 먹지도 사지도 말고 아껴라. 화장 진하게 하지마라. 정숙하게 행동해라. 정말 지겨워. 물귀신들처럼 나를 잡아끌었어. 아마 언니들이 없었으면, 나는 내 또래 친구들과 쟁반에 구슬 구르듯 그렇게 살았을 거야. 그랬다면, 지금 죽을지도 모를 상황에서, 이런 바보 같은 문구들을 써내려가지 않아도 됐겠지.” 동생을 부모 대신 키워온 큰 언니의 어깨가 쉼 없이 들썩거렸다. 고작 십년의 세월을 먼저 산 것 뿐인데, 언니의 어깨에 지어진 짐은 너무 무겁고 잔인했다. 언젠가 언니가 말했다. “바람이 불어, 아주 세찬 바람이 말이야. 나를 산산 조각내어, 이 세상에서 흔적도 없이 날려 버렸으면 좋겠다. 바람의 힘을 빌리면, 나도 가볍게 날아 갈 수 있을까?” 사그라지는 햇빛을 받으며, 내장이 전부 날아가 버린 듯 서있는 큰언니가, 문을 열면 금방이라도 날아갈 듯, 투명해보였다. 혼자서는 설수 없었던 세상에 대한 두려움이, 우리를 떨어지지 못하게 했다. 합침만큼 불행도 비껴가려니 믿었다. 그래서 각자의 정체성은 희생되어져야 했다. 우리는 새로운 것을 찾아내는데 힘을 합치는 것이 아니라, 가지고 있는 것을 잃지 않기 위해 힘을 합쳤다. 우리가 안정이라며 둘러친 울타리 밖으로, 막내를 나가지 못하게 했고, 누구도 막내의 손을 붙잡지 못하게 했다. 그것이 사랑이고 보호며, 우리들의 의무라고 믿었다. “언니들이 죽은 후, 남은 인생 내 멋대로 살려고 했는데, 이게 뭐야? 내가 먼저 죽어야 되잖아. 아니, 어떻게 이혼한 동생을 칠년 동안 혼자 살게 놔 둘 수가 있어? 자기들은 믿던 곱던 남편이 있으니 외롭지 않겠지. 자신들한테 싫증나고 귀찮은 남편이라고, 나또한 그러리라 생각한 거야? 그런 이기주의적인 사랑이 어디 있어? 내가 언니들하고 있으면, 행복과 안정을 얻는다고 믿은 거야, 안 그래? 천만에, 언니들 사랑은 가짜야. 아주 질 나쁜 모조품이었다고. 자기들 설움에 나를 옭아매고, 자기들 행복에 나를 승차시키고, 자기들 감정 뒤치다꺼리나 하게 하고. 내가 왜 암에 걸렸겠어? 그렇게 행복한 동생이 말이야. 언니들 동생이 아닌, 여인으로 나를 봐 준적 있어? 없을 걸,” 결국 큰 언니는 버티지 못하고, 소파에 몸을 던졌다. 센 불에 보글거리며 끓고 있는 떡볶이는, 어느 영화가 그려낸 지옥의 불구덩이 같았다, 나는 불을 줄이고 싶지 않았다. 나쁜 일은 절대로 빗겨가는 일 없고, 좋은 일은 번번이 슬쩍 지나쳐버렸던, 우리의 인생으로 본다면, 이번 막내의 암 선고를, 이웃집 이름 모를 여인의 불행 쯤으로 넘길 수는 없을 것 같은 불안감과, 기다렸다는 듯이 자신의 죽음을 사실화시켜, 저렇듯 억울함을 호소하는 막내를 보며, 더 이상 투정이라 밀쳐놓을 수 없었다. “나도 저 나무들처럼 다 떨어내버리고 홀가분해졌으면 좋겠다. 얼마나 가벼울까?” 창쪽으로 돌아 앉아 동생의 하소연을 듣던 작은 언니가 말했다. 마지막으로 파를 썰어 넣고, 가장 화려한 접시를 찾아 떡볶이를 올려놓았다. 통깨를 뿌리고, 잘못된 것이 없는지 살폈다. 동생 앞에 접시를 내려놓았다. 동생은 떡볶이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전원이 나간 텔레비전을 계속해서 바라보고 있었다.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동생은 검은 화면 속에 비친 우리들의 모습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 화면 안에서 동생의 표정과 마주쳤다. 무섭도록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나는 얼른 동생을 외면했다. 김이 모락모락 오르던 떡볶이는, 갓 봉우리를 열기 시작한 순한 장미색을 버리고, 썩은 핏빛으로 변해갔다. 그러도록 동생은 포크를 집지 않았다. 나 또한 동생이 고맙고 맛있게 떡볶이를 먹어 주리라 기대하지 않았다. 어차피 떡을 사러간 큰 언니나, 그것을 만든 나나, 모두 동생의 아픔에 대한 속죄의 행위였기 때문이다. 떡볶이는 그렇게 말라가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나는 입 언저리에 붙어 있는 종기딱지를 세차게 잡아 뜯었다. 선홍색 피가 뚝, 하얀 카펫트 위에 떨어졌다. “언니 피나잖아? 카펫트에. 어머머 지워지지도 않는데.” 동생은 민첩하게 걸레와 락스를 가져와, 필요 이상의 힘을 주며, 한 방울의 피를 제거했다. “도대체 내 소리는 누가 듣고 있는 거야? 모두들 사태의 심각성을 모르고 있어? 어떻게 자신의 몸에 난 딱지 따위에 신경을 쓸 수 있으며, 창밖 풍경을 눈에 넣을 수 있는 거야? 정말 끝까지 이기적이야. 내가 이런 언니들을 위해, 서커스단의 아기 곰처럼 재롱을 떨고 산 거야.” 큰 언니와 작은 언니가 동시에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이미 손가락으로 내 몸에서 탈출하려는 또 다른 피를, 힘주어 막고 있었다. 나는 눈물이 났다. 참을 수가 없었다. 누군가가 울어야했다. 나는 울었다. 눈물이 되어 쏟아져야 할 슬픔을, 억지와 심통으로 풀어내려는 동생의 입을 막아야했다. 아니, 그것은 나의 울음이 이미 터지고 난 후, 떠오른 생각이였다. 큰 언니가 울었고, 이어 작은 언니도 울기 시작했다. 하지만 막내의 눈은 도리어 기다렸던 먹이감이라도 포착한 것처럼, 생기가 돌았다. 수십 년 세월만큼 깊어진 막내와의 감정의 골은, 끝도 없는 평행선이 되어 달려가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언니들 동생이었어? 스스로들 생각해봐. 큰 언니는 언제나 서럽고 슬픈 모습을 들이대며, 자신을 동정하라고 명령했어. 작은 언닌 ‘욕망의 전차’에 나오는 불랑쉬처럼, 불안과 허세로 항상 흔들거리는 다리 위에 서 있었고, 셋째 언니는 이루지 못한 자신의 꿈에 포박당해, 현실 밖으로 나오려 하지 않았잖아. 나는? 언니들 말해봐. 나는 언니들에게 어떤 동생이었어? 나를 보호했다는 말은 하지마. 나는 단연코 언니들에게 보호받은 것 없어. 나는 인생과 투쟁해보지도 않고 지쳐버린 언니들을 위해, 노래하고 춤췄어. 내 생활은 언제나 뒷전이고, 언니들이 부르면 달려가고, 언니들이 부르지 않아도 달려가야 했어. 그래서 나에겐 남편이 있으면 안됐지. 언니들은 그것을 즐기기 위해 이혼 후, 나에게 남자가 생기는 걸 원치 않았던 거야. 언제든지 부르면 달려와야 하거든. 내가 언니들과 함께 있으면 행복했던 것 같아? 천만해, 나는 언제나 허전했어. 너무 허전해서 밤에 울기까지 했어. 내 이야기는 누가 들어 주지? 누구한테 내 가슴 속을 들여다 봐 달라고 하나. 어째서 자신들의 불행은 힘들어하면서, 동생의 불행은 보지 못하나, 하면서. 나는 언니들 때문에 친구도 없어. 친구 사귈 시간이 있었어야지. 자, 이제 내가 죽을지 몰라. 아니, 죽을 거야. 그러면 언니들은 어떻게 할까? 큰 언니는 자기 탓이라고, 그 탓이 어떤 건지도 모르면서 무조건 울어대겠지? 지금도 아마 쉼없이 마음 속으로 울고 있을 거야.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까지 끄집어 올리면서. 작은 언니는 더 불안해하겠지. 손은 더 떨리고, 목소리는 더 날카로워지겠지. 화장은 더 진해져 화장하는 시간이 늘어날 거고, 수시로 쇼핑몰을 돌며 사지도 못할 것들을 기웃거리다, 그것들을 거친 욕망으로 만들어 가슴속에 집어넣겠지. 언니는 관에 누워있는 나와 마지막 작별 인사할 때에도, 그 화장을 지우지 않을 거야. 셋째 언닌? 제일 문제가 언니야. 언니는 칩거하겠지. 자신의 인생도 다 살지 못했으면서, 지구상의 모든 인생을 허무하다, 싸잡아 슬퍼하겠지. 허무는 허무를 낳고, 결국엔 그 허무가 인생을 어둠 속으로 끌고 내려가, 파멸시키는데 말이야. 그까짓 글 나부랭이로, 어떻게 땀 흘리는 사람들의 진실된 하루를 표현할 수가 있다구. 동트기 전 이른 새벽에 고속도로를 달려봐. 개미행렬 같은 전조등들을 보면 가슴이 뭉클해져. 다시, 어둠을 가르며 집으로 돌아오는 그들 차 위에 무엇이 올려져있을 것 같아? 하루 양식인 빵 한 조각. 그 빵 조각이 의미하는 게 뭔지 알아. 단지 위장만 채워주는 탄수화물 같아? 아니야, 그 빵은 희망이고 정열이고 투쟁이야. 살아가는 이유인 거지. 언닌 이 때가 기회다 싶겠지. 언니의 허무주의를 증거할 수 있는 완벽한 증거니까. 살아보려고 애쓰던 어린 동생이, 속절없이 젊은 나이에 삶을 마감하고, 흔적조차 없이 소멸된 것을 보면서. 이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들을 부질없다고 단정짓겠지. 내가 마음 편히 죽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들이야. 언니들은 나를 편히 죽지도 못하게 하잖아.” 죽음이, 가슴 바닥까지 긁어낼 수 있는 용기를 준걸까. 우린, 어쩌면 이토록 동생에게 낱낱이 해부되었을까. 소위 글을 쓴다는 나는, 어째서 도를 넘고 있는 동생의 감정을 잘라 낼 수 있는, 말 한 마디 던지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글로는 수도 없이 죽고, 수 천 년 살아온 듯 멋을 부리고. 인생살이에 도통한 사람처럼 온갖 척을 다했으면서 말이다. 나는 너무 답답해 가슴을 쥐어 잡고 끙끙거렸다. 동생이 갑자기 일어나, 나의 등을 세차게 내리쳤다. “울어, 울란 말이야. 그렇게 말고 엉엉 소리 내서. 언니가 우는 이유는 나 때문이 아니야. 언니는 한 번 쯤 이렇게 울고 싶었어. 도대체 지성적으로 보여지길 바라는 이유가 뭐야? 그게 세상사는 데 무슨 도움이 되는데? 돈 없는 사람은 감정에 충실해야 편한거야. 언니가 그랬지? 전국노래자랑에 나온 사람들처럼 순수하게 살고 싶다고. 자, 눈물부터 그렇게 쏟아내 봐, 안으로 삼키지 말고. 다 토해내.” 동생은 다시 한 번 세차게 등을 내려쳤다. 엉엉엉, 건전지를 집어넣은 것처럼 소리가 터져 나왔다. 미안해, 미안해, 너를 힘들게 해서. 나는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다. 의지할 곳을 찾지 못한 불안과, 벗어날 수 없는 가난이 만들어 낸 가식적인 나를, 문학으로 포장해 거리에 내놓고, 누군가 쳐다봐주길 초조하게 기다리며 살아온 시간들. 그 시간들이 만들어낸 밀랍인형 같은 나. 동생은 세상에 보여 지지 못하는 나의 글이, 나의 목을 조이고, 나의 삶을 황폐화 시킨다고 말했다. 숨길 글이라면 도대체 쓰는 이유가 뭐냐며, 종 주먹을 들이대기도 했다. 그 말들이, 무수한 아픔 속에서 잉태되어 나온 말이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울음을 멈출 수 없었다. 오래된 무성영화가 끝도 없이 내 머릿 속에서 돌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동생은 자신이 찔러 터트려버린 나의 눈물을 멍하니 내려다보고 있었다. 큰 언니가 무릎을 힘겹게 끌고 내게로 와, 함께 울기 시작했다. “다, 내 잘못이야. 너희를 이렇게 아프게 하다니. 내가 똑똑했다면, 너희 가슴에 접혀진 날개를, 마음껏 펼 수 있도록….” 이제와 다 부질없는 일이라는 듯, 언니는 말을 삼켰다. “너희들을 의지하면 안됐는데, 너희들 보다 강해져, 힘차게 끌었어야 했는데.” 자신의 나약함이 동생들 인생길에 커다란 장애물이 되었다는 것에, 큰 언니는 슬퍼했다. “그래, 큰 언니도 울어. 단 한 번도 촉촉함을 느낄 수 없는 언니 얼굴, 자신이 살아온 희생적인 삶을 세상이 알아주길 애원하는 그 비루한 모습, 동생들에게 줬으면 그만이지, 그 시간들을 보상해내라는 듯, 확인하고 확인하는 언니. 그래서 우리가 항상 언니 앞에서 죄인이 되어야하는 거지같은 기분. 큰 언니 알아? 나에겐 24시간이 짧았어. 나에게만은 48시간이 하루였으면 좋겠다. 그래서 언니들 사이를 왔다갔다 하며, 하루도 거르지 않고, 웃을 수 있게 재롱을 떨었으면 좋겠다. 누가 알까, 동네방네에 알려진 우리 사랑이, 이렇게 고통의 덩어리라는 걸” 정수리 한가운데 무리지어 솟아오른 흰머리가, 사그라지는 언니 몸의 무언가를, 사악하게 빨아들이고 있는 듯 했다. “그래서, 그 사랑을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거니? 듣자듣자 하니까 얘가 끝이 없네.” 작은 언니가 끼어들었다. 참 오래 참고 있었다. 동생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잠깐씩 작은 언니를 훔쳐보며, 말을 이어나갔었다. 진하게 바른 마스카라는 작은 볼을 점령했고, 유난히 앙상한 두 손은, 존재만으로도 버겁다는 듯, 연거푸 떨고 있었다. 하지만 부인할 수 없는 공통된 설움 앞에서, 작은 언니의 천방지축 감정은 아직 숨을 죽이고 있었다. 작은 언니는 접시에 떡을 하나 건져 올려놓고, 포크로 잘게 토막을 내는 것으로, 분을 삼키고 있었던 것이다. 쥐색에 은빛이 묻어나는 브라우스 칼라가 형광등에 반사되어, 빼곡히 자리 잡은 목주름을 잔인하게 비추고 있었다. 말을 던진 작은 언니가, 이제 내 차례이니 해보라는 듯이, 동생을 향해 저돌적인 고개짓을 던졌다. 잠깐 숨을 고른 동생이, 자세를 바꿔 앉으며 공격태세를 갖췄다. “언니는 그 화장 좀 지워. 절대 못 지우지? 동생 죽음과도 바꾸지 못 할 거야. 언니 화장은 언니의 그 알량한 자존심이니까. 언니 알아? 그 화려한 화장이, 큰 언니 후줄근한 것보다, 더 나를 아프게 한다는 것, 왜 맨 얼굴로 당당하게 세상 밖으로 나가지 못해? 언니가 얼마나 예쁜지 알아? 왜 허전한 마음 가리려고, 예쁜 얼굴에 가면 쓰고 다녀야 되는데? 그런다고 가려져? 천만해 사람들은 바보가 아니거든.” “또, 내화장이 문제니? 내버려두라고 했지? 그것 말고 다른 것으로 해라. 응? 평생을 이렇게 살았는데, 뭐 어쩌라고. 화장 안하던 사람도, 관 속에 들어갈 때 화장하는 것, 너 모르니? 마지막 가는 길, 화장하고 가잖아, 나는 매일 죽는 날을 기다리는 거야. 너, 죽는 것 그것 아무 것도 아니야. 너무 위세 떨지 마라. 나도 기다리고 있으니까. 아니, 우리 모두가 기다리고 있는 거야. 너무 확실하니까, 일상 속에 자리를 내주지 않는 것 뿐이지. 살기만도 정신이 없는데.” “언니!” 큰 언니와는 달리, 자신의 공격을 가벼이 받아치는 언니를 향해, 막내는 앙칼지게 소리질렀다. “내 말이 무슨 뜻인지 몰라서 동문서답이야 지금? 언니의 그 도가 지나친 화장은, 다른 사람들 화장과는 의도가 다르잖아. 언니는 얼굴에다, 설움, 불안, 욕망, 조급함, 그런 것들을 범벅으로 칠한 거잖아.” “너, 너무 비약한다. 참는 것도 한계가 있다. 그만해라.” 그래도 설움만 삼키는 큰 언니와는 달리, 작은 언니답게 막내의 말끝마다 딴지를 걸었다. “내가 언제 이렇게 노골적으로 언니화장에 대해 말한 적 있어? 사실 매일 하고 싶었지. 어떤 때에는 락스를 갔다가 언니 얼굴을 싹싹 문질러 버리고 싶은 충동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오늘은, 죽음을 목에 건 자의 특권으로, 내가 하고 싶은 말 전부 할 거야. 죽고 나서 할 말 못해, 귀신으로 다시 나타나는 것보단 낫잖아?” “그래, 귀신으로 나타나지 말고 할 말 다 하고 가라.” 비로소 떡볶이가 눈에 들어왔는지, 막내가 포크를 집어 들었다. 포크가 떡을 찌르기 전에, 내 눈이 먼저 떡에 닿았다. 떡볶이는 내버려진 것에 대한 원망처럼, 마른 보호막을 치고 있었다. 동생은 한 번에 막을 걷어내더니, 가지런히 정돈된 떡을 사정없이 흐트러트린 뒤, 포크를 떡 사이에 밀어 던졌다. 나는 눈을 감아버렸다. “나 죽는 날을 시점으로, 화장을 지워. 언니 얼굴이 저 찬란한 태양을 직접 만날 수 있도록. 마스카라도 칠하지 말고, 늙은 산딸기 맆스틱도 칠하지 말고, 코 양 옆에 기둥도 세우지마. 한 번 그렇게 해봐. 인생이 어떻게 달라지나. 궁금하지 않아?” 누렇고 둥근 보름달이 음흉스럽게 거실 안을 드려다 보고 있었다. 창백한 초생 달이었으면, 우리가 좀더 이성적인 마음으로 이 자리에 있지 않았을까. 울음을 끝낸 후, 나는 보름달을 피해 부엌으로 갔다. 진한 커피 한 잔으로 애처로운 자신을 위로하고 싶었다. 하지만 부엌으로 오자, 동생에게 먹을 것을 만들어 주고 싶은 마음이 먼저 들었다. 위장이 채워지면 좀 너그러워지지 않을까, 혹여 더 하고 싶은 말이, 부질없다 느껴지지 않을까, 무엇이 먹고 싶을까. 이 순간 동생이 먹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왜 나는 모르는 것일까. 나는 두 손을 성경책 위에 올려놓듯, 커피포트에 올려놓고, 또 다시 눈을 감았다. “언니, 커피 타려구.” “응” 나는 반가움에 눈을 커다랗게 떴다. “우리, 다방커피 타먹자. 아주 진하게, 커피도 많이 넣고, 프림도, 설탕도, 듬뿍듬뿍” “그래” ‘듬뿍듬뿍’ 이란 단어에 동생은 필요 이상의 액센트를 집어넣었다. 우리 네 자매의 삶에는 ‘듬뿍듬뿍’ 이란 없었다. 바닥에 흩어진 볍씨를 긁어모으듯, 그렇게 살았다. 노력과 수고만큼, ‘듬뿍듬뿍’이 되지 않는 것이 인생이고, 우리도 예외 없이, 궁핍이란 단어를 삶 속에 박음질한 채 살아오고 있었다. ‘듬뿍듬뿍’이란 단어에서 이토록 다정스럽고 풍요로움이 흘러나오는지, 예전에는 느껴보지 못했다. “우리 아이들은 능력있는 여자와 결혼 시킬 거야. 살림 잘하는 것, 나는 원하지 않아. 아이들? 내가 키워 줄 거야. 현모양처의 기준이 달라졌어. "살려 주세요. 우리 언니들 모두 보낸 후 나를 데려가세요" 옛날 초등학교 책에 나오는 영희는 더 이상 이 시대에 없어. 만약 있다면, 그영희는 무능한 거야. 돈이 행복을 가져다 주지는 않지만, 돈 없으면 행복을 지킬 수 없어. 이 시대는 욕망을 만들어내는 시대거든. 욕망이 뭐야, 더 좋은 것, 더 맛있는 것, 더 멋있는, 더 행복한 것을 추구하는 거잖아. 옛날에는 비교할 수 있는 행복의 기준이 적었지. 하지만 요즘은 어때? 모든 상품가치나 삶의 질이 돈에 의해 정해지잖아. 옛날에는 제주도지만, 지금은 하와이로, 티코에서 벤즈로, TV는 어떻고 돈에 따라 선명함의 차이란, 옛날에는 차 종류가 이렇게 많았나, 핸드폰이 있었나, 여행? 고작 내 나라였지. 교육은 어떻고, 한글이나 한문이면 됐지. 예능교육? 절대적 교육은 아니였지. 돈에 노예가 됐다고 어떻게 손가락질 할 수 있겠어. 얼마 전에, TV에 나온 젊은 여자연예인은, 상대 남자를 자신의 애인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아주 당당하게 말하더군. 남자가 가난하기 때문이래. 얼마나 솔직한 거야.” 막내가 영희를 인정하지 않는 이유에도, 역시 우리들이 있었다. 무능한 영희들인 우리를 더 이상 이해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무능한 형부들을 내치고 힘차게 삶을 개척하기는커녕, 도리어 동정과 연민으로 붙들어 매고, 웰빙과 여행과 여가가 화두가 되어 버린 요즘 세상에. 그 끝자락도 붙들지 못하고 사는 언니들의 삶에, 더 이상 그 어떤 동정도 보내지 않겠다는 것이기도 했다. ‘내가 죽으면 어떻게, 무능한 언니들 누가 지키라고, 우리 언니들 누가 웃게 하고, 누가 데리고 다녀? 안돼, 나는 절대 죽을 수 없어. 죽기 싫어. 살려 주세요. 우리 언니들 모두 보낸 후, 나를 데려가세요.’ 동생은 지금, 이렇게 울부짖고 있는 중이였다. 나는 커다랗고 새하얀 머그잔에, 넘칠 만큼 커피를 담아 동생에게 내밀었다. “음, 맛있어.” “어디 봐.” 작은 언니가 동생의 커피를 빼앗아 한 모금 마셨다. “오랜만에 마시니까, 좋네. 나도 한 잔 타줄래?” “큰 언니는?” “나는 밤에 커피 못 마시잖아.” 커피를 마시지 못하는 것조차 무능하다는 듯이, 큰 언니가 구슬프게 말했다. 나는 커피 한 잔을 더 타서 작은 언니에게 건넸다. 언니 입술에 묻어있는 붉은 맆스틱이 하얀 머그잔에 옮겨졌다. 그래도 언니의 작은 입술은 여전히 붉었다. 떡볶이 쟁반을 들고 일어서려는 나를, 막내가 주저앉혔다. 나에게 건너올 말이 남아있다는 듯이 숨을 골랐다. 이미 거실엔 동생의 죽음으로 인한 슬픔은 존재하지 않았다. 죽음이 만들어낸 횡포만 있을 뿐이었다. “언닌, 말을 해. 아프면 아프다고, 힘들면 힘들다고. 큰 언니 넉두리나, 작은 언니 진한 화장처럼이라도. 언니 글쓰기는, 언니를 외지고 어두운 곳에 고립시키고 있어. 언니를 밝은 세상으로 나오게 하긴 커녕, 언니가 쓴 소설 속 주인공에 갇혀, 현실과는 자꾸 담을 쌓고 있잖아. 언니 소설 주인공들은 현실에 살 수 없는 사람들이야, 다 정신병자야. 그런 사람들과 살고 있으니, 현실이 두렵고 무섭지. 그리고 썼으면 세상에 내보내야지. 신춘문예에 응모하고, 갖가지 공모전에도 보내보고, 정성 들여 가꾼 언니자식을, 세상에 내보내야 성장할 거 아니야. 맞고, 터지고, 짓밟히더라도, 그 이유를 알아야 발전이 있지. 그렇게 하지 않으니, 자신의 글이, 자신의 숨통을 틀어쥐는 거지. 그리고 언니는 너무 고상해. 그래서 사람들이 가까이 다가가지 못해. 내가 그런데 남들은 어떻겠어? 언니 앞에선 춤도 못 추겠고, 섹스 이야기나, 저질스런 농담도 못하겠어. 언니와 대화를 하려면 미리 말을 정돈시켜야 돼. 그 말은, 언니 가슴에 철퍼덕하고 안길 수 없다는 말이야. 그러면 언니가 외롭게 세상을 살아야 돼. 그렇지 않아도 복잡하고 힘든 세상에, 누가 복잡한 사람과 함께 있고 싶겠어. 그러니 적당히 풀어놓고 살아. 칭찬할 것도 있어. 어려운 상황에서도 꿈을 놓지 않고 노력하는 것, 하지만 그 꿈을 이루려는 방법이, 현실과는 맞지 않아.” 나를 이제껏 지탱하고 있던 동아줄이 맥없이 올을 풀어내고 있었다. 이제 나는 마음을 비우고, 수백 미터 아래로 떨어질 몇 초의 순간만 기다리면 된다. 차라리 마음이 이렇게 편할 수가. 보이지 않기 위해 수십 년 동안, 포장하고 포장해 논 나의 정체성이, 막내에 의해 한 순간에 발가벗겨진 것이다. 비록 내보일 수 있는 용기는 없었지만, 글을 쓴다는 것으로, 남과는 다른 사람으로 비쳐지길 원했다. 그것마저 없다면, 평범함을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쓴 글마다 동생에게 내밀었는지도 모른다. 막내가 나를 차별화시켜 주고, 막내의 입을 통해 주변사람들이 차별화시키도록 말이다. 나는 웃었다. 웃지 않고는 그 자리에 앉아있을 수 없었다. ‘나도 죽고 싶다. 저 계집애보다 먼저 죽고 싶다.’ 끈끈이에 유인된 파리처럼 허우적대는 언니들의 모습, 그것이 막내가 원하는 것이었을까? 큰 언니와 작은 언니의 성난 표정이 막내를 쏘아보고 있었다. 분위기에 전혀 맞지 않는 나의 웃음은 모두를 당황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아무리 죽음으로 무장한 특권이라도, 심했다는 것을 알았는지, 막내가 두 언니의 눈길을 피했다. “역시 너는 섬세하고 똑똑해.” 웃음을 멈추고, 두 언니의 시선을 막내에게서 거두기 위해, 나는 태연을 가장하며 말했다. 나의 감정을 숨기는 일, 그건 내가 제일 잘 할 수 있는 유일한 행위다. “아, 배고프다. 우리 뭐 먹을까?” 막내가 만족하다는 듯이 기지개를 펴며 말했다. 막내의 식욕을 반기며, 큰 언니가 재빨리 일어섰다. “새우 사왔는데 볶음밥해 줄까?” “좋아 맛있게 만들어줘. 우리 밥 먹고 다시 의논하자.” 우리는 동생 말에 어안이 벙벙해 서로를 쳐다보았다. 창밖, 사라진 보름달이 동생 얼굴위로 옮겨 앉은 것 같았다. 세 사람의 정성으로 만들어진 볶음밥을 탐스럽게 먹고, 파인애플로 후식까지 끝낸 동생은, “그까짓 12월 달 달력도 뜯어. 이리 줘. 달력이 무슨 소용 있어. 어차피 경계선이 무너져 버린 시간에 살고 있는데” 하며 볼펜을 집어 들었다. 우리는 서로 설거지를 하겠다며 부엌으로 몸을 피했다. “언니들 다 이리와 앉아. 설거지가 뭐가 그렇게 급해? 나 죽은 다음에 해도, 언니들에겐 시간이 남아돌잖아.” 동생이 더 세차게 우리의 목줄을 잡아끌기 전에, 순순히 동생 앞에 무릎 꿇고 앉았다. 도대체 세상 사는데 나이의 많고 적음이 무슨 소용인가. 동생은 하얀 종이 위에 ‘경비’ 라고 썼다. 뒷면에는 20세기 천재화가 달리가 애증으로 그려낸 프로이트의 초상화가, 죽어있는 시체를 일으켜 앉혀 논 것처럼 묘사되어 있었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동생의 감정이 불안했기 때문에, 셋은 숨죽이고 동생이 써내려갈 다음 활자를 기다렸다. ‘비행기표, 호텔비, 교통비 음식값….’ 아! 여행을 가려나 보구나. 신상 공격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감지한 우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가라. 어디든 갔다 와라. 사채를 끌어서라도, 너의 여행은 호화스럽게 보내주마. 그렇게 속죄할 양이었다. “자 언니들, 우리 어디로 갈까?” “우리도?” “우리도? 그럼, 언제 죽을지 모르는 동생을 혼자 보내려고? 정말 그런 생각들을 조금이라도 가지고 있었던 거야?” “아니, 아니, 우리도 가야지.” 큰 언니가 얼른 상황을 수습했다 “언니! 직장은 어쩌고?” 큰 언니의 현실을 작은 언니가 일깨웠다. “언니! 지금 직장이 문제야? 평생 다녀 지금 떼부자 됐어? 행복해? 우리가 한 달 여행 떠난다고, 길에 나 앉지 않아. 다들 직장 그만둬. 내일 병원 결과 보고 바로 떠날 거야. 어디 가고 싶은지 말들 해봐. 나는 한국은 싫어, 너무 가고 싶지만, 이런 기분으론 가면 안돼. 추억이라곤 모조리 처량한 것들이라, 기분을 도리어 엉망으로 만들어 버릴 거야. 새로운 곳으로 가자, 멋진 곳으로. 죽기 전에 볼 수 있게 된 것에 감사할 곳으로. 세계 불가사의로 지정된 곳들 1위에서 10위까지 돌아볼까? 그래, 그 앞에서라면 아마 살고 싶은 욕망 따윈, 이슬로도 목이 꺾기는 가냘픈 풀꽃처럼 생각될지도 몰라. 어때 언니들은?” 어차피 동생이 운전대를 잡고 있다. 조금 나아진 듯한 동생 기분을 지속시키는 것이,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우리는 과장된 흥분을 담아 말했다. “와, 환상적인 계획인데.” “비용은 모두 내가 댈 거야. 언니들은 한 푼도 안내도 돼. 아, 내가 얼마나 부질없는 짓을 그 오랜 세월 한 건지. 톨스토이 작품 중에, 자신이 내일 죽을지도 모르면서, 영원히 헤지지 않는 가죽장화를 만들어 달라고 한 작품, 기억나? 내가 그 짓을 한거야. 노후에 애들한테 손 내밀지 않으려고, 조금씩 모아둔 돈이 있거든. 아무리 쪼들려도 그 돈은 건들이지 않았어. 우리 넷이 여행하기엔 충분한 돈이야. 그러니 우리 생애 처음 호화스러움을 느껴보자. 맛있는 것 실컷 먹고, 좋은 호텔에서 묵을 거야. 하루 온 종일 행복해하자. 작은 언닌 화투도 꼭 챙겨야 돼. 셋째 언닌 여행 떠날 때까지 고스톱 배워야 하고. 우선 옷과 신발을 사야겠어. 우리 모두의 옷을.” 아, 이럴 수가! 동생 죽음을 위한 마지막 여행 소나타에, 내 마음이 춤을 추고 있다니. 더군다나 재빨리 어두운 옷장 속을 뒤집고 있으니 말이다. ‘저런 여우같은 것. 그렇게 돈을 짱 박아 놓다니’ 작은 언닌 분명 이렇게 되뇌이고 있을 거란 걸, 표정으로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우리들 얼굴은 소낙비에 말끔히 씻긴 동백나무 잎처럼 찬란한 빛까지 만들어 내고 있었다. “이번엔 그 누구도 청승떨지 마. 여행지까지 몸에 밴 궁상을 떨어내지 못하고 온 사람은. 차비도 주지 않고 어딘가에 버리고 올 거야.” 앞서가는 선생님을 따라가는 유치원생이 된 듯, 우리는 말 잘 듣겠다는 의지를, 의연한 눈빛으로 동생에게 전달했다. 잠시 동생이 자리를 비운 사이 우리는 동생이 모아 둔 돈이 얼마인지 의견을 주고받았고, 대략, 여행 규모로 미루어, 삼만불 정도가 되지 않을까, 잠정 결론을 내렸다. 동생의 여행계획이 누구를 위한 것인지, 돈은 누구를 위해 모아 두었는지. 어째서 우린 막내 앞에서, 언니이길 포기하고 있는 것인지. 생각해야 했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이상하게 동생의 힘이 죽음으로 얻어진 것이며, 우리는 그 힘을 부러워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어쩌면 우린, ‘끝’ 이 될 수 있는, 그 죽음을 동경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다음날 병원으로 향하는 우리들의 발걸음은 이상하리만치 가벼웠다. 너무 묵혀 썩기 시작한 진실을 모두 꺼내, 우리에게 내보인 동생의 발걸음이 가벼워서인지, 아니면 어제 하루, 죽음의 공포와 처절하게 싸운 결과 얻게 된, 면역체 때문인지, 그도 아니면, 어쩔 수 없는 인간의 이기주의로 인한, 여행에 대한 들뜬 기분에서인지, 구분되지 않았다. 뿔테안경 너머로 우리를 건너다 본 의사는, 자신이 동생을 죽음에서 건져올린 듯, 의기양양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행히도, 자궁만 절제하면 별 문제는 없습니다. 전이가 되기 전에 발견된 것을 천행으로 여기십시오. 수술날짜는 다음주 월요일입니다.” “너, 여행은 가야 돼. 계집애, 시건방지게 언니들이 어떻고 어째? 말 못하다 죽은 귀신이 들어 왔었나.” “막내는 한 번 말한 건 꼭 지키는 애잖아.” “자, 우리 옷사러갈까?” “아직, 더 모아야 돼. 신나게 놀려면 충분치 않아. 누가 어제 뭐라고 했어?” 부서지는 태양 속으로, 겨우 내려놓은 짐을 다시 짊어지고, 하지만 아주 가볍게, 동생은 뛰어갔다. 어제 하루 동안 쏟아낸 만큼, 동생의 어깨를 가볍게 해주어야 된다고 다짐하며, 우리도 동생이 뛰어들어간 빛 속으로 힘차게 달려갔다. 우리가 빠져나온 어둠의 동굴이 자폭하고 있었다. <끝>

2009-05-04

[중앙신인문학상] 단편소설 부문 가작 "길동이 엄마"

남극에 겨울이 시작되었다. 하나 둘 모여든 황제펭귄들이 광활한 설원 위에서 꼬리를 문 행진을 시작한다. 길눈이 어두운 선두의 오락가락에 대오가 흩어질 만도 한데 펭귄들은 용케도 제 자리를 찾아 어기적어기적 느린 걸음을 옮긴다. 억만년 전의 선조들이 새겨준 기억 하나로 찾아가는 그 곳. 두 달 여 행진 끝에 찾아낸 후미진 빙판 위에서 그들은 혹독한 추위와 배고픔을 무릅쓴 채 짝짓기를 하고 아이를 낳아 기를 것이다. 스무 번도 넘게 보았던 비디오를 또 다시 보고 있는데 엄마에게서 전화가 왔다. 길동이 엄마가 재가를 했다는 소식을 전하는 엄마는 어처구니 없다는 듯 코웃음부터 쳤다. 전화선을 타고 오는 목소리에 양 미간을 힘껏 모으고 입술을 동그랗게 오므리는 엄마의 새치름한 표정이 함께 따라왔다. '세상에!' 평상시엔 수다하지 않던 엄마가 줄줄이 사탕처럼 그칠 줄 모르고 말을 쏟아내는 통에 나는 단 한 마디만 거들었다. 정말이지 '세상에!'이다. 길동이 엄마는 30년 전 우리 집 가사를 거들어주던 도우미 아줌마였다. 수년씩 남의 집에서 기거를 하며 일을 돌보던 식모들이 하나 둘씩 사라지자 도움이 필요한 쪽이나 시간당 일이 필요한 쪽 이쪽저쪽 사정을 주물러 나온 것이 파출부라는 신종 직업이었다. 그러니까 길동이 엄마는 그 직업이 막 붐을 타던 시절에 두 팔을 걷고 일을 시작한 초창기 멤버쯤 되는 셈이었다. 유달리 깔끔한 성격으로 동네에서 소문이 자자하던 엄마는 제 입맛에 맞게 몇 년씩 이르고 가르쳤던 자야언니가 갑자기 떠나버리자 안절부절못하기 시작했다. 위로는 대학 졸업반의 언니부터 아래로 중학교에 다니는 남동생까지 줄줄이 다섯 아이들의 삼시 세 때 끼니를 대주는 일만 생각해도 앞이 깜깜해졌다. 도와줄 사람을 들여야 하겠는데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집에 데리고 있을 만큼 믿을 만한 사람이 없었다. 자야언니만 해도 동향 친지가 '믿어보라. 아니면 내 손에 장을 지지겠다'라는 확답을 서너 번 받은 연후에야 인연을 맺었지만 이제 생판 모르는 사람을 집안에 들여야 할 판이었다. 타고난 약골에 한 번도 혼자서 도맡아본 적이 없던 큰살림을 부둥켜안고 엄마는 전전긍긍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밤마다 진동하는 파스 냄새에 엄마의 앓는 소리가 담을 타고 넘어갈 즈음 이웃 산동네에서 구세주 한 분이 왔다. 대문을 사정없이 두드리는 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담벼락에 번듯하게 달린 초인종을 두고 자동차 하나가 들락날락 거릴 만큼 커다란 철제 대문을 두드리는 이는 흔치 않았다. 숨넘어가게 덜컹이는 대문의 빗장을 서둘러 풀고 문을 활짝 밀어열자 나의 코 밑에 한 꼬맹이가 서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꼬맹이 아줌마였다. 돌돌 말아 올린 머리에 쪽을 쪄 백금 비녀를 꽂았는데 두상이 하도 조막만하다보니 무쇠 젓가락 한 짝이 그의 머리 한 가운데를 무지막지하게 관통하고 있는 듯 요상한 모양새였다. 어린 계집아이들이 흔히 입던 만화 그림이 그려진 스웨터는 가슴께로 치올린 고쟁이에 가려 신데렐라의 머리가 중간에서 댕강 잘라져 있었다. 의아하게 바라보던 나를 빤히 쳐다보며 그가 말했다. "나가 길동이 엄마여!" 양손을 뒷짐 지우고 길동이 엄마는 뒤뚱거리는 걸음으로 집안엘 들어왔다. 마치 집수리를 할 때 견적을 내는 수리공처럼 집 전체를 꼼꼼히 들여다보더니 오전 내내 이부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있던 엄마를 향해 혀부터 찼다. 펭귄들은 어기적어기적 걸음을 옮긴다 그들은 추위와 배고픔을 무릅쓴 채 짝짓기를 하고 아이를 낳아 기를 것이다 "쯧쯧 이 큰 살림을 워찌 혼자서 다 했다요? 아줌씨 손가락이 남아나질 안았겄소." 아픈 엄마가 안쓰럽다는 위로인지 되도 않는 체력으로 괜한 짓을 했다는 핀잔인지 길동이 엄마는 당최 애매한 말투로 엄마에게 첫 인사를 건네었다. "한 시간에 오백 원! 반나절은 네 시간 온 나절은 여덟 시간. 공일은 절디로 안돼지라. 더도 덜도 안 되이 두 말은 하지 마시오." 엉거주춤 반쯤 일어나 뭐라고 한 마디 건네려던 엄마는 연이어 날아오는 쐐기에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애초에 길동이 엄마는 주인집 허락을 기다릴 양이 아닌 듯했다. 자기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부엌엘 들어서더니 양동이를 끌어다가 키 큰 싱크대 앞에 세워 놓고 까치발로 올라섰다. 그리고는 지난밤부터 수북이 쌓인 그릇들 속에 두 손부터 쑥 밀어 넣었다. 양철 설거지통이 요란하게 덜거덕거렸다. 설거지를 마치자 냉장고 안을 샅샅이 닦아내고 저녁 찬으로 쓸 야채며 생선을 꺼내 뚝딱뚝딱 손질을 마치기까지 이러니 저러니 물어오는 일도 불평을 하는 일도 없었다. 입술마저 옹 다물고 있어 오히려 궁금한 쪽은 엄마였다. "저녁 반찬은 뭐라 카드노?" 엄마가 작은 소리로 내게 물어왔다. 길동이 엄마는 이 방 저 방을 쉬지 않고 들락거렸다. 예의 허리를 한 번 편다거나 숨 한 번 돌리는 일 없이 오로지 일감이 있는 곳을 향해 돌진 또 돌진하는 다부진 병사와 같았다. 저녁 식탁이 마련되고 하늘 서편에 노을이 살짝 걸릴 때쯤 길동이 엄마는 깨끗이 빨은 행주를 싱크대위에 휙 던지며 말했다. "나는 이제 가야겄소. 울 아그 길동이 밥 해줘야 하니께. 일은 시방 다 했응께 한 이틀 있다 올라요. 아 글고 삯은 한 주일마다 주시오. 까묵지 말고 꼭 주시오." 엉덩이께로 내려간 고쟁이를 가슴까지 끌어올리더니 철 대문을 요란스레 여닫고 길동이 엄마가 돌아갔다. "뭐 저런 여편네가 다 있노!" 대문이 닫히는 소리를 듣고 나서야 엄마는 눈을 흘기며 한 소리를 했다. 몸이 안 좋은 탓이라고는 했지만 길동이 엄마가 집안을 누비던 내내 한 마디도 거들지 못하던 엄마가 의아하긴 했었다.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대로 꼼꼼히 살펴보면 자기의 성에 차지 않는 일이 수두룩할 것이라며 엄마는 분기탱천해 있었다. 그런 엄마를 안방에 두고 식구들은 길동이 엄마가 차려놓은 맛깔스러운 밥상 앞에서 분주히 젓가락을 움직였다. 이틀 후에 또 다시 철제 대문이 덜컹거렸다. 문을 열자 코 아래는 잘려나가고 두 눈만 남은 신데렐라가 턱 하니 버티고 있었다. 인사를 할 사이도 없이 '나여 길동이 엄마!' 라고 외치며 그가 집안으로 쑥 들어왔다. 현관에서 신발을 벗는 그를 쳐다보던 엄마가 미간을 찌푸렸다. "초인종 있는 거 안 보입니꺼? 와 대문을 동네 시끄럽게 두들기는 교? 체신머리 없게시리." "뭔 체신 말이여? 초인종이 있음 뭐하요. 내 키가 요로코롬 작은 디 손에 닿기나 하간디여? 토깽이처럼 깡총거려도 손까락 끝자락에도 못 미쳐여. 아줌씨가 내 초인종을 따로 맹글어 주던가 아니믄 내가 오는 시간에 문을 열어놓든가 양 단간에 결정을 하시오." 순간 엄마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해졌다. "이 양반이 누구한테 이래라 저래라 하능교. 아지매 명색이 내가 주인인데 말뽄새가 그라면 우얍니꺼. 지금까지 일 하믄서 그것도 몬 배웠어예?" 지난 번에도 그랬지만 길동이 엄마의 바로 그 '하시오' 체가 엄마의 기분을 사정없이 망가뜨리고 있다는 것을 나는 진작 알고 있었다. 본인이 누누이 말하기를 뼈대 있는 집안의 자손으로 아랫사람을 가르치기만 하지 본 때 없는 치에게 하대를 받으며 살 수는 없다는 자존심이 늘 가슴에 품은 은장도처럼 날이 서 있던 엄마였다. 지금껏 남편과 자식을 비롯해 이웃들까지 엄마의 말끝을 연이어 잡아채는 이는 거의 없었다. 자분자분한 말씨에 단정한 몸가짐 게다가 왠지 살짝 건드리기만 하여도 화들짝 눈 꼬리가 올라가는 말간 낯을 한 엄마를 앞에다 두고 실없는 소리나 험한 소리를 건네는 사람은 정말이지 흔치 않았다. "아줌씨는 지가 마음에 안 들어서 그런다요 지 일이 마음에 안 들어서 그런다요? 나는 본시 이래밖에 말 못하요. 배운 게 있다믄 이리 살겄시유? 근디 말씀만 하시오. 일을 잘 못하믄 하시라도 나갈텡게. 아니 지금이라두 오라는 데는 많은디 한 번 일 하자구 한 약조를 워찌 쉬 깨겠스라. 보아하니 아줌씨 근력으론 하루 이틀 만에 픽 쓰러질 것이구 새 사람 구할 때 꺼정 내 있어줄라요. 그닝께 언제든 말씸만 하시오." 도리어 선심은 자기가 쓰고 있다는 길동이 엄마의 대답에 엄마는 곧 제 분에 넘어갈 것만 같았다. 그런 엄마를 세워두고 길동이 엄마가 천연덕스럽게 부엌으로 들어가 버리자 엄마는 득달같이 안방으로 들어가 수화기를 들어 몇몇 번호를 돌리더니 집안이 떠나가게 큰 소리로 외쳤다. "사람 하나 빨리 구해 주이소!" 사람은 오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오겠다던 이는 갑작스레 다리가 삐었다 하고 지금은 일이 많아 시간을 내기 어렵다 하고 이래저래 길동이 엄마의 손을 빌어 집안 살림을 꾸려 나간 지 달포가 지나고 있었다. 약속을 쉬 깰 수 없다던 길동이 엄마는 그 말처럼 철석같이 약속을 지키며 제 시간에 꼬박꼬박 철제 대문을 두드렸고 빈틈없이 집안일을 마감지었다. 이번에는 반드시 본때를 보이겠노라 벼르던 엄마는 길동이 엄마의 현란한 말솜씨 앞에 매번 입만 벌린 채 속수무책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그간 수없이 많은 사람을 거느려본 엄마가 이쯤에서 길동이 엄마의 버르장머리 고치기를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수시로 시간 내에 끝을 내기 어려운 부탁을 하거나 아리송한 지침을 주어놓고 결과물에 대해 타박을 놓기 일쑤였다. 김치 담기만 해도 그렇다. '젓갈은 쬐매 고춧가루는 마이'처럼 당최 양을 가늠하기 어려운 표현을 써 놓고 길동이 엄마가 김치를 담아내는 족족 면박을 주었다. 서너 번 말없이 당하고만 있던 길동이 엄마는 어디서 구했는지 크기가 다른 양푼을 여럿 구해와 엄마에게 내밀었다. "쬐매가 요놈이여 조놈이여? 마이라면 요 양푼이여 저 양푼이여?" 이를 때마다 정확한 양을 표시해 놓으라고 엄마의 턱 밑에 던져놓고 돌아가 버렸다. 엄마는 늘어놓은 양푼들을 채웠다 비웠다 하느라 그날 밤을 꼴딱 새우고 말았다. 장독 밑바닥에 구멍을 내놓고 물로 독을 가득 채어보라고 다그치는 팥쥐 엄마처럼 엄마는 꾀를 내는 일에 몰두했지만 문제는 그 구멍이 너무 컸다는 데에 있었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알아내지 못할 것이라 싶어도 길동이 엄마는 귀신같이 구멍을 찾아내어 엄마에게 당찬 항의를 퍼부었다. 아니 엔간히 작은 구멍도 면밀하게 찾아낼 만큼 길동이 엄마는 침착하였고 여유가 있었다. 그러니 날이 지날수록 버르장머리 고치기는 엄마에게 고스란히 화살이 돌아가곤 했다. 엄마가 몹시도 바빴던 어느 날이었다. 저녁 찬거리가 떨어져 시장엘 가야 했는데 여간해서 짬을 낼 수가 없었다. 아직도 남이 미덥지 않아 손에 현금을 줘 본 적이 없었지만 종이에 살 것과 대략 가늠이 되는 값을 또박또박 적어 길동이 엄마에게 장을 보라 일렀다. "아지매 어디 딴 데 기웃거리지 말고 후딱 댕겨오이소." 종이가 건네지고 한참이 지났지만 길동이 엄마는 왜인지 움직이지 않았다. 종이를 거꾸로 들다가 옆으로 들다가 손으로 문지르다가 뚫어지게 들여다보고만 있었다. "뭐 하능교. 후딱 댕겨오라카이." "근디 아줌씨! 이거 뭐라고 써놓았시요?" 갑자기 엄마의 얼굴이 화끈거리기 시작했다. 시골의 양가집 규수로 자라 신식 학교라곤 담 밖에서만 뱅뱅 돌았을 뿐 운문을 제대로 뗀 적이 없었던 엄마였다. 누군가가 '이름을 쓰시오' 라고만 하여도 글자 한 자 쓰느라 달달 떨리는 가슴을 움켜쥐어야만 했다. 창피를 당하는 일만큼은 죽도록 싫어 아이들 어깨 너머로 한글을 깨우치긴 하였지만 쓸 때마다 철자가 아리송한 게 늘 마음에 걸렸다. 이 치 앞에서마저 창피를 당하게 되는구나 뒷목에서 땀이 비실비실 묻어 나왔다. 그때 길동이 엄마가 말했다. "나는 글자를 몬 읽는디. 우짰꼬나. 그냥 말로 일러주시오." 순간 엄마는 목구멍을 꽉 막고 있던 그 무엇이 명치 아래로 살살 기분 좋게 내려가고 있음을 느꼈다. "글짜를 몬 읽는다꼬예? 하모 먹고 살기 힘든데 우예 핵교꺼정 보내줬겠능교. 그라고 보믄 아지매 같은 사람들이 젤로 불쌍하다 아닌교. 쯧쯧." 엄마는 일일이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낭랑하게 찬거리를 읽었다. "시금치 한 단 고등어자반 한 손…." 길동이 엄마가 글씨를 읽지 못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엄마는 지난 날 그로부터 받은 불쾌감이 거의 상쇄가 되어가는 것을 느꼈다. 엄마는 누가 뭐래도 대갓집 마나님이었고 길동이 엄마는 누가 뭐래도 그 대갓집의 일을 해주는 일개 파출부임이 다시 한 번 확인된 셈이었다. 엄마는 한층 더 너그러워졌고 그런 엄마를 쳐다보며 길동이 엄마는 가끔 '이 양반이 뭘 잘 못 먹었구나' 심드렁한 표정을 짓곤 했다. 급기야 엄마의 호기심은 길동이 엄마의 일거수 일투족에서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들었다. "지끔 몇 시라예?" 시계 앞에 선 길동이 엄마가 고개를 모로 꼬고 손가락으로 하나하나 짚으며 대답했다. "두시 하고도 삼십분이 넘고 있지라." "오늘이 며칠이라예?" 일 달력에 바싹 붙어 그 역시 손가락으로 세어나갔다. "삼월 초닷새라는구만유." "우째 그래 잘 아능교." 그때마다 엄마는 어린 초등학생을 가르치는 선생님처럼 만면에 웃음을 가득 띠며 말했다. 글자라는 기호를 사용하지 않는다고 해서 길동이 엄마가 세상 돌아가는 이치나 셈이 어두울 것이라는 억측은 엄마만이 지니고 있는 것 같았다. 오히려 길동이 엄마는 자신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차질 없이 일을 처리해 나갔다. 한동안 조용한가 싶더니 어느 날 엄마와 길동이 엄마 간에 말다툼이 벌어졌다. 매 주마다 받는 주급의 액수가 맞지 아니 하다고 길동이 엄마가 따졌다. 엄마는 꼬박꼬박 가계부에다 적고 있으니 틀릴 리가 없다고 맞섰다. 한참 승강이가 오고 간 후에 엄마는 가계부를 들고 나와 길동이 엄마의 눈앞에 들이대었다. "자 여기 보소. 내가 아지매 몇 시에 오고 몇 시에 갔는동 다 적어놓았다 아입니꺼? 이래도 우길라요?" 보여준다고는 했지만 엄마는 길동이 엄마가 자세히 보려고 얼굴을 들이밀자 가계부를 탁 닫아버렸다. "뭐 보믄 알아예? 몬 읽는다믄서." 엄마의 얼굴에서 득의양양한 미소가 번졌다. "아줌씨가 쓴 거를 나가 어찌 알간디유. 헌디 나가 쓴 거를 보믄 다 알아뿐지라." 엄마보다 더 득의에 찬 미소를 던지며 길동이 엄마는 고쟁이 속에 손을 쑥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아주 꼬질꼬질하고 도톰한 수첩 하나를 꺼내어 한 장씩 들추었다. "여그 보시오. 5월 25일부텀 30일꺼정 두 온나절에 한 반나절을 왔다라고 적혀 있잖여?" 깨알처럼 써놓은 것은 끝도 없는 막대 표시였다. 하루면 막대 하나 열흘이면 막대 열개 삼십 날이면 막대 삼십 개. 그리고 반일은 세모 하루 종일은 동그라미를 그려놓아 자세히 들여다보면 잘 알아볼 수 있게 만든 길동이 엄마만의 장부였다. 과연 손가락으로 짚어 나가는 곳에 꼭 눌러 쓴 표기가 있었고 바로 그제 하루 종일을 반일로 잘못 기입한 쪽이 다름 아닌 엄마라는 것도 밝혀졌다. 기억을 더듬어 보아도 확실했다. 얼굴이 벌게진 엄마를 앞에 두고 길동이 엄마는 연신 싱글거렸다. "암만 지가 아줌씨 글씨를 워찌 알갔시유? 모르지라. 긍디 너무 쏙 끓이지 마시오. 사람이 저 잘났다 저 잘 났다 해도 워떠케 몽짱 다 잘 났겠시유. 쪼께 실수도 하는 기 사람 아니겄소?" 이쯤에서 백기를 들었으면 좋으련만 엄마가 또 한 마디를 거들었다. "그기 우리 집 껀지 우예 압니꺼? 우리 집이라꼬 써 놓지도 몬 하믄서." "하이고 퍼렁색 수기 책이잖유. 이 집은 대문 색깔이랑 똑같이 퍼렁 색이라니께. 누렁색 뻘겅색 분홍색. 나가 색깔은 다 알지라. 암만!" 노기등등하던 엄마의 기세가 나날이 무디어 가면서 일견 두 사람도 별 탈없이 지내는 것처럼 보였다. 적어도 엄마가 '우리 집안은.. 우리 가문은..' 하면서 으스대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우리 판검사님 집에 저게 있당께요. 음매, 좋은 거" "판사면 판사고 검사면 검사지, 판검사가 뭐꼬. 무식하그로!" 집집마다 저 마다의 풍습과 예절이 다른 것이 마땅하거늘 엄마는 늘 우리의 것이 다른 이의 것보다 낫다고 여겨야만 직성이 풀렸다. 남의 것을 좋은 마음으로 눈 여겨 보지 않으니 어떻게 시대가 급변하고 사람들의 생각이 바뀌어 가는지 영 따라 잡지를 못하고 있었다. 그리곤 곧 죽어도 따라 잡지 못하는 자기의 한계를 감히 보통 사람은 넘보기 어려운 뼈대 있는 집안의 소신쯤으로 상치시켜 버렸다. 주위를 둘러보아도 자기와 동급인 사람 한 둘에 아랫사람 열 명 누가 뭐래도 본인은 거느리고 사는 사람이라는 착각 속에서 나름 평온한 세월을 보내던 중이었다. 그런데 그 평온도 길동이 엄마로 하여 곧잘 위태로워지곤 했다. "우리 집안에선 이래 안 해요. 못 배운 사람들이 그래 하지." 엄마와 달리 찝찔한 조선간장 대신 달짝지근한 양조간장으로 조물조물 무쳐낸 길동이 엄마의 시금치 무침만 해도 그렇다. 거기에 참기름과 깨소금을 담뿍 넣어 반지르르하게 담아내면 보기만 하여도 침이 꼴깍 넘어가거늘 배우고 안 배운 것이 시금치 무침과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건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몇 번의 통박을 당하고 길동이 엄마가 점잖게 말했다. "아줌씨 나가 댕기는 집이 모다 한 벼슬 하는 집 아니요? 아줌씨도 잘 알겄구만이라. 쩌 언덕배기에 담이 무작스레 커다란 집들 말이랑께요. 하나는 판검사 집이구 하나는 의사 큰 회사 사장 아 그라고 선교산가 하는 미국 사람도 있슴시라. 모다 요로코롬 먹는당께요. 아줌씨처럼 구닥다리로는 안 먹지라. 그닝께 나가 맹글어주믄 그냥 드셔보시소." 확실히 길동이 엄마는 엄마보다 한 수 위였다. 언젠가 십년 전에 사서 가보처럼 모시고 있던 미제 냉장고에 살짝 상처가 났을 때 그것을 두고 한 달 내내 길동이 엄마의 손놀림을 탓하자 길동이 엄마는 최신 전자제품들이나 가전제품들이 텔레비전에서 보일라치면 엄마부터 불러 앉혔다. "저거 쫌 보시쇼. 우리 판검사님 집에 저게 있당께요. 음매 좋은 거" "이거는 우리 의사 선상 집에 두 대나 있는디. 아무나 못 가지지 암만" 하면서 슬슬 약을 올리기도 하였다. 이래저래 족보나 재산 명예에 이르기까지 말을 꺼내어놓고 본전도 못 찾는 일이 잦아질수록 엄마의 어깨가 점점 쪼그라들어 길동이 엄마보다 훤칠하게 잘 생긴 용모가 무색할 지경이었다. "판사면 판사고 검사면 검사지 판검사가 뭐꼬. 무식하그로. 그라고 지가 판검사가? 어데서 으스대쌌노!" 아무리 벼슬하는 집 문턱을 넘어 다닌다 하여도 길동이 엄마는 일개 일 거드는 사람일 뿐 어디 감히 그 댁 식구인 냥 행세를 하느냐고 엄마는 틈만 나면 분을 내었다. 행색이 그렇게 구질해서야 누가 부엌 일선에 두겠느냐는 말처럼 길동이 엄마는 진짜 찬모가 아니라 바깥마당에서 허드렛일만 하는 보조 찬모였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절밥 삼년이면 염불도 외운다고 가사를 처리 하는 그의 솜씨엔 무언가 다른 것이 있었다. 아무리 일이 많아도 시간 안에 반드시 끝을 내는 수행 능력을 넘어 침착하고 세심하고 고급스러운 그 무엇이 있었다. 거기에 몇 달이 지나도 돌보고 있는 집의 일일랑 여간해서 떠벌리지 않는 무거운 입도 대갓집의 사람들과 영 무관하지 않게 여겨지는 부분이었다. 일을 맡길 만한 사람이 당장 없어서라는 건 엄마의 핑계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매번 엄마가 자존심을 긁혀가면서도 길동이 엄마를 쉬 내치지 못하는 이면엔 어쩌면 저 언덕배기의 대갓집 살림살이가 우리 집 안방에도 묻어오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는 편이 맞을 것이다. 눈만 뜨면 '뼈대'를 들먹이긴 하였지만 실상 그 뼈대가 우리 집 목조건물의 대들보의 무게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엄마도 적이 모르지 않는 눈치였다. 우리는 서울 시내에 집 한 칸 작은 사업체 하나밖에 지니지 못한 소시민 가정일 뿐이었다. 백날 집안에서 호령을 하여도 긴한 일이 일어날 때 줄이 닿는 관공서 직원 하나 없어 발만 동동 구르는 무력한 소시민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니 일개 찬모인 길동이 엄마가 아주 가끔 들려주는 언덕배기 대갓집과의 인연은 엄마 역시 다다르고 싶은 욕망의 주소지가 되고도 남았다. 그런데 꿈에 그리던 그 인연은 아주 참담하게 이루어졌다. 어느 초겨울 저녁이었다. 막내인 남동생 종식이가 하루 종일 감감 무소식이라 애를 태우고 있던 차에 경찰서에서 대뜸 전화가 걸려 왔다. 댁의 아이가 불량배들과 패싸움을 했으니 와서 벌을 받을 지 말지 결정을 하라는 전화였다. 이제나 지제나 하였지만 막상 듣고 보니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소식이었다. 혼비백산한 엄마는 맨발에 슬리퍼만 끼우고 득달같이 달려갔다. 스무 명쯤은 족히 되어 보이는 남자 아이들이 터지고 멍이든 얼굴을 씰룩 거리며 경찰서 바닥에 웅크리고 있었고 과연 그 가운데 종식이가 무릎 사이에 머리를 처박고 앉아 있었다. 아침에 말끔하게 다려입힌 검정 교복은 단추가 다 달아나 속내의가 훤히 내다 보였고 횟가루를 뒤집어썼는지 허연 얼룩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묻어있었다. 엄마는 벌써 사색이 되어있었다. 합의를 해야 풀어준다는 둥 입건이 될 지도 모른다는 둥 생전 가까이서 들어보지도 못한 단어들이 경찰서 책상 위를 날아다닐 즈음 문을 세게 젖히며 누군가 황급히 뛰어 들어왔다. "길동아! 나 아그 길동아!" "엄니 나 여그 있어!" 종식이 옆에 꾸부리고 있던 덩치 큰 녀석이 신나게 양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그때까지 용케 두 다리로 버티고 있던 엄마가 풀썩 땅바닥으로 주저앉아 버렸다. '내 아기 길동이' 그 말을 할 때면 길동이 엄마의 목소리에서 영락없이 축축한 물기가 묻어나왔다. 일을 하러 올 때마다 종일 먹는 것이라곤 밥 한술에 짠지 한 쪽 그것도 물을 말아 훌훌 넘기기만 하는 지라 우리 집의 저녁상이 차려질 즈음엔 길동이 엄마의 뱃가죽이 등에 붙어 있었을 것이 틀림없었다. 한데 그득한 밥상을 앞에 두고 한 술 뜨고 가라는 청을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었다. 대신 '내 아기 길동이' 밥 먹일 생각에 곧장 문밖으로 달음질을 쳤다. "길에서 아그를 낳았으이 길동이제." 언젠가 엄마가 이불 빨래를 함께 만지다가 왜 아들 이름이 길동이냐고 물은 적이 있었다. "첫째 딸은 내 나이 열일곱에 낳았는디 나 혼자서 탯줄을 잘랐당께요. 첨이라 잘 안 잘라져서 고생 옴팡 했구먼. 둘째 딸 때에는 아주 깨끗이 잘랐지라. 긍디 셋째 딸은 옴마 나가 혼자 잘 낳고 있었는디 또 딸년이냐고 냄편이 들어와 뜨거운 물 양동이를 발로 차는 바람에 아그가 홀라당 덴 거여. 지끔두 몸이 오그래졌뿐졌지 뭐라. 난중에 사내 아그 몬 낳는다고 죽도록 얻어 맞고 낳은 기 바로 울 아그 길동이여." 이불 홑청 한 끝을 거머쥔 길동이 엄마가 손아귀에 힘을 주는 지 맞잡고 있던 엄마 쪽의 홑청 끝이 쑥 빠져 버렸다. "소작 얻은 집 논일 해주고 오다가 논바닥에서 아그를 낳았어유. 잘 보이 꼬추가 달린 거여. 하이고 얼매나 좋던지 고 핏덩이랑 남은 아그들을 들쳐 업고 그 길로 도망을 쳤뿌렀지라. 내 나이 열 하나에 민메느리로 시집을 가서 죙일 논일 밭일 집일 다 해주고도 밥 한술 얻어먹기 힘들었는디. 밥풀 몇 개 주워 먹을라치믄 먹는다고 때리고 쬐매 앉아 등짝이라도 펼라 치믄 일 안 한다고 때리고 냄편이 아니라 저승사자였땅께요. 고로코롬 맞고 살아도 언감생심 꿈도 못 꾸던 일을 아 글씨 길동이가 나오니까 쩌 밑에서 힘이 볼끈 솟는 거여. 대한독립만세가 따로 업드만. 밤기차를 탔는디 나는 그기 별 천지로 가는 아폴로 뭔가 하는 뱅기인 줄 알았당께요." 길동이 엄마는 옆에 놓인 사발의 물을 한 모금 물더니 이내 푸 하고 홑청에 뿜었다. 얼마나 힘 있게 뿜었는지 사방천지로 튀어 엄마의 눈에도 그의 눈에도 한참동안 물기가 가시지 않았다. 귀하게 얻어 귀하게 키운 길동이었다지만 실상은 귀하게 자라주질 않았다. 중학교를 들어서면서 온갖 못된 짓은 다 하고 다닌다는 소문이 우리 엄마의 귀에도 진작 들려왔다. 종식이가 물고 온 소식이었다. 밥만 잘 먹이면 다냐 어째 아이를 그렇게 키우느냐고 핀잔을 주고도 남았을 엄마이지만 우리 쪽 사정도 여의치가 않았다. 종식이야말로 길동이 버금가게 일을 저지르고 다니던 우리 집의 유일한 골칫거리였기 때문이었다. 이웃 학교에 다니면서 연배도 길동이랑 비슷하여 모르긴 몰라도 길동이와 노는 물이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어림짐작만 할 뿐이었다. 그런데 그날 짐작은 사실로 드러나 버렸다. 경찰서는 달려온 부모들과 아이들의 고함소리로 귀청이 떨어질 듯 소란스러웠다. 우리애는 안 그랬네 저 애가 먼저 그랬네 자기 말만 들으라고 생떼를 쓰는 통에 담당 형사는 아예 귀를 솜마개로 틀어막고 있었다. 진한 로션 냄새를 풍기며 미국 사람, 미스터 로보트가 왔다 미스타를 연발하는 길동이 엄마의 당찬 콩글리시는 막힘이 없었다 엄마는 벽을 바라보고 등을 진 종식이를 멀찍이서 노려보면서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고 길동이 엄마는 덩치 큰 길동이에게 바싹 달라붙어서 아이의 항공모함 같은 등을 연신 쓸어내리고 있었다. 어린 아이들이니 쉬 훈방이 될 것이라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고 사람들이 소곤거렸다. 얼마 후 담당 형사가 사건에 대하여 설명을 해 주었다. 길동이와 종식이 외에 여섯 녀석들이 한 패가 되어 건너 동네에서 온 건달패들과 영역 싸움을 하였다는 요지였다. 여기까지는 어느 정도 예상을 했던 바였다. 문제는 영역이란 것이 아이들이 들락거리는 만화방이나 분식점 정도가 아니라 숱한 폭행 사건에 연루가 되었던 술집들을 지칭하는 것이었고 또 폭력 조직과도 연관이 있어 단순히 훈방이 될 사안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엄마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사라지더니 몸이 좌우로 휘청거렸다. 바로 그때 형사의 코밑에서 설명을 듣던 길동이 엄마가 사람들을 제치고 갑자기 문밖으로 내닫는 것이 보였다. 그러더니 한 십 분쯤 지났을까. 앉아서 조서를 꾸미던 담당 형사가 어디선가 걸려온 전화 한 통을 받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대뜸 경례를 올려 부쳤다. 수화기에 대고 '네! 네!'라고 소리를 버럭 지르더니 곧 '오길동'을 불렀고 두 말도 없이 경찰서 밖으로 아이를 돌려보냈다. 종종 걸음으로 길동이를 따라 나가던 길동이 엄마가 몸을 돌려 넋이 나가 있는 엄마에게로 느릿느릿 다가왔다. "나가 아줌씨 체면도 있고 해서 계속 모른 척 할라고 했는디 인사는 해야 쓰겠지라. 긍디 미안해서 워쩌까요. 우리 판검사 선상님이 길동이를 겁나 이뻐항께로. 나는 먼저 가요잉. 욕보시오." 엄마가 획 돌아서는 그의 팔을 억세게 붙들었다. "아지매 기냥 가면 우얍니꺼. 우리는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 아지매가 그 판검사 양반한테 말 쫌 해주이소. 아지매 아이믄 우리 종식이 우얍니꺼. 지발예." 엄마는 작달만한 길동이 엄마의 팔에 죽자 사자 매달렸다. "글씨… 고건 어렵겠는디. 우리 판검사 선상님이 아무나 챙겨주진 않는다고 했는디. 길동이는 하도 이뻐야 하니께. 우짠다냐." "우리 종식이도 이쁘다 말 쫌 해주이소. 우예 꼭 쫌 도와 주이소." 길동이 엄마의 목소리에 점점 더 힘이 들어갈수록 엄마는 점점 더 코맹맹이 소리를 냈다. 길동이 엄마를 앞세우고 종식이를 빼 오던 날 이후로 엄마는 근 열흘 동안 앓아누웠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전과 달리 끙끙 소리를 내지도 않았고 말미에는 어금니를 앙 물은 채 주는 밥을 우걱우걱 다 밀어 넣었다. 열흘 후 자리를 털고 일어나자마자 엄마가 비장하게 말했다. "우리 집에서도 판검사 맹글어낸다! 반다시 나올 끼다!" 구겨지고 망가진 엄마의 자존심은 고스란히 우리 자식들에게 빚으로 얹혀졌다. 가정교사가 붙고 시간표가 짜이고 잠시도 쉴 틈 없이 엄마의 닦달이 이어졌다. 그것도 모자라 판검사가 되려면 영어도 유창해야 한다며 미국 사람까지 물색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아버지가 점심시간에 짬을 내어 다녔던 영어 회화 학원에서 선생 하나를 모셔 오기로 했다. 말은 그렇게 하고 다녔지만 미국 사람을 그것도 주말마다 집안에 들인다는 것이 엄마에겐 엄청난 부담이었다. 우선 첫날 식사를 내놓는 것부터가 영 가늠이 되질 않았다. 한참을 고민 끝에 돈을 좀 쓰더라도 떡 부러지게 잘 차려진 양식을 내기로 결정을 하였다. 아이들의 사기도 북돋우고 우리를 우습게 아는 이웃이나 길동이 엄마에게 우리 집도 그리 호락호락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보여주고도 싶었다. 양식이라곤 과일 샐러드밖에 모르는 지라 양식 잘 하는 사람을 찾다가 시내 모 호텔 주방에까지 부탁을 넣었다. 나이가 갓 삼십쯤 되어 보이는 요리사가 조수 하나를 대동하고 택시에 한 가뜩 음식을 싣고 나타났다. 짐을 받아 나르던 길동이 엄마의 두 눈이 어리둥절해졌다. 경찰서 사건 이후 엄마는 길동이 엄마와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있어도 없는 듯 차분하다기 보다는 애써 무심하게 길동이 엄마를 대하고 있었다. 그날도 집에 미국 사람을 초대한다는 얘기를 숨긴 체 번듯하게 요리를 차려놓고 구경만 시켜줄 작정이었다. "아지매는 부엌에 들어올 필요 엄꼬 마당에서 뒤 설거지만 하믄 됩니더. 지가 유명한 호텔 요리사를 오라했다 아입니꺼." 길동이 엄마는 가타부타 말없이 알았노라고 고개를 끄덕였지만 부엌에서 쫓겨났다는 사실에 불쾌한 표정이 역력했다. 요리는 미국 사람들이 명절 때마다 먹는다는 칠면조 요리로 정해졌다. 닭백숙 한 마리도 귀한 판에 닭 서너 마리는 족히 넘어 보이는 어마어마하게 커다란 칠면조가 쟁반만한 접시에 올려졌다. 뭉근하게 쪄 낸 빵 조각에 기름기가 둥둥 떠다니는 허연 소스도 곁들여졌다. 빨갛게 속이 덜 익어 보이는 햄 고구마를 으깬 것 몇 개의 빵을 담은 바구니 등 생전 먹어보지 못했던 희한한 요리들로 상차림이 시작되었다. "양식은 데커레이션이 제일로 중요하죠." 요리사가 똑 부러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상이 작아서 옆집에서 큰 교자상을 빌렸지만 요리사가 가지고온 식탁보를 깔고 음식 몇 가지에 사람 수대로 큰 접시들 하나씩 포크니 나이프를 놓는 것만으로도 더는 틈이 없어 가운데 세워놓겠다던 꽃병은 도로 가져가 버렸다. 마침내 진한 로션 냄새를 풍기며 미국 사람 미스터 로보트가 왔다. 몸집이 땅딸막하고 피부가 가무잡잡한 로보트는 아무래도 반쯤만 미국 사람인 것 같았다. 생김새가 앞집 철물점 아저씨와 얼마나 흡사하던지 식구들의 코에서는 김빠지는 소리가 그치질 않았다. 곱게 한복까지 차려입은 엄마가 옆구리를 찔러대는 통에 입을 다물기는 하였지만 낯선 말에 낯선 음식을 앞에 두고 모두가 꿀 먹은 벙어리들처럼 허공만 바라보았다. 고작 아버지가 더듬거리는 영어로 몇 마디 할 뿐 로보트의 쏼라 거리는 소리만 상위에서 쩡쩡 거렸다. 요리는 하나같이 맨송맨송하기만 했다. 포크로 깨작거리다보니 도무지 양다리를 하늘로 치켜 벌린 칠면조가 줄어들지 않았다. 한데 사정은 로보트도 달라 보이지 않았다. 그때 미스터 로보트가 말했다. "김치?" 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수북이 김치를 썰어 담은 보시기를 들고 길동이 엄마가 득달같이 튀어 들어왔다. "암만 한국에 왔으면 한국 음식을 먹어야제. 우리 미국 선교사가 그랬으라. 미스타도 잘 알아뿐졌네 오께이?" 그렇게 시작이 되었다. 애꿎은 칠면조를 밀어 낸 자리에 보글거리는 된장찌개가 올라오고 언제 지졌는지 빈대떡 접시가 날아왔다. 연신 웃음을 터트리는 로보트 옆에 바짝 붙어 앉아서 미스타를 연발하는 길동이 엄마의 당찬 콩글리시는 막힘이 없었다. 그 기운에 힘입어 마침내 식구들이 하나 둘씩 입을 떼기 시작했다. 유쾌하고도 소란스러운 저녁상이 무르익어 갈 무렵 방 한 귀퉁이에서 바닥에 놓인 칠면조의 살을 발라내던 엄마가 토라진 목소리로 길동이 엄마에게 소리쳤다. "아지매! 그래 좋으면 미스타 로보뜨네 집에 가서 일 하믄 되겠네. 이제 우리 집에는 고마 오소. 그라고 이 칠면조인가 닭 할밴가 하는 거 이거 몽짱 다 아지매 가져가든지 야옹이한테 던져 주든지 하소! 맛도 지지리도 엄찌. 우째 갸도 먹을랑가 모르겠구마!" 길동이 엄마와의 인연은 그 날로 끝이 나 버렸다. 마침내 남극에도 여름이 찾아왔다. 제법 자란 아기 펭귄 한 마리가 멀어져 가는 엄마 펭귄의 뒤를 열심히 좇고 있지만 엄마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훠이훠이 제 갈 길로 걸음을 재촉한다. 망연히 서서 엄마의 등 뒤를 바라보던 아기 펭귄이 이윽고 발길을 돌린다. 옹기종기 모여든 아기 펭귄들이 바다 해빙의 바다로 하나씩 둘씩 힘차게 뛰어 들어간다. 또 다른 행진이다. 벌써 한 시간 째 영화도 끝이 나 버렸건만 엄마는 여전히 전화통에다 대고 길동이 엄마 얘기를 늘어놓았다. "길동이 장가 가 아도 다 낳았고 이제 지 할 일 다 했다고 고마 지 갈 길로 날아간다 카더라. 시상에 체신머리도 엄찌. 나이가 환갑이 넘어가지고 새로 살믄 얼매나 산다꼬. 얼매나 남세스러운 일이고. 아 근데 길동이 어매가 누구한테 시집을 갔는지 아나? 로보뜨다 미스타 로보뜨!" 길동이 엄마와 미스터 로버트! 나는 아주 오래간만에 통쾌한 웃음을 터트렸다. 〈끝>

2009-04-30

[중앙신인문학상] "아버지의 북"

아버지는 북을 치셨다 저승 꽃구경 금방 다녀 올테니 술 상 보고 있으라던 아버지는 여태 돌아오지 않는다 추적추적 오시는 비조차 목마른 남의 땅에서 그 북소리 그리워 술판을 벌인다 한 잔 술은 아버지 내 빈 잔 속에 눈물 방울이 후드득 떨어진다 오래 기다렸지야 아가 연분홍 어린 눈에 아버지가 들어 앉고 복사 꽃잎 두 손 모아 잔을 받는다 얘야 한 잔 하자 아이고 아직 꽃망울도 안 잡힌 얘한테 웬 술이라요 흘깃하는 어머니의 눈길도 술상 머리에 내려와 앉고 비는 진양조 가락으로 조심스레 장단을 넣는다 덩 덩 덩더쿵 덩 더더 쿵더쿵 때묻은 아버지의 추임새에 훠이훠이 한 숨 자락이 제비되어 몰아가고 시르렁 시르렁 박타령을 불러 온다 시르렁 실근 톱질이야 에이여루 톱질이로구나 몹쓸 놈의 팔자로다 원수놈의 가난 이로구나 실근 실근 시르렁 시르렁 배가 정 고프거든 허리띠를 졸라매고 에이어루 당거주소 시르렁 실근 당거주소 아버지 그 곳은 비가 들어요 어머니 모시고 이쪽으로 와서 당기시오 아니다 아가야 우리는 괜찮으니 니 어깰랑 젖지 마라 그래도 아버지 제 옆자리가 비었는데 이리 건너 오셔서 쉬엄쉬엄 당기시오 시르르르르 당거주소 ■당선소감 - 박선옥 "바다서 육지로 나를 이끌어준 시" 문득 '엄마는 50에 바다를 발견했다'는 포스터가 스치고 지나간다. 하지만 내가 떠 있는 바다는 달랐다. 사막같은 바다 한가운데에서 늘 혼자라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 헤엄을 못치는 나는 바다에 떠있는 어떤 것이라도 붙잡아야 했다. 그래서 시의 끄트러미를 잡고 놓지 않았다. 나는 육지가 그리워서 이곳을 어서 나가고 싶었다. 하지만 내게 발목을 잡힌 시는 만만치 않았다. 그는 나를 데리고 역류를 하기도 하고 잠수하기도 했다. 나는 오히려 그에게 잡혀서 그가 이끄는 데로 갈 수 밖에 도리가 없었다. 그 소용돌이 속에서도 정신을 잃치 않으려고 자그마한 주먹을 쥐었다 폈다 했다. 그러던 어느날 그가 나를 육지에 데려다 주었다. '휴우'하는 안도의 한숨과 동시에 고마웠다. 많은 사람들이 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특히 오렌지 글사랑과 글마루 회원님들의 따뜻한 시선은 시의 눈을 틔우는데 밑거름이 되었다. 이제 나 혼자 자라나야 함을 안다. 두렵고 힘들겠지만 또 어떻게든 땅을 일구고 살아 남아야 하지 않는가

2009-04-27

[중앙신인문학상] 시·시조 부문 가작 "바나나 먹는법" - 부재(不在)

1. 빈집에 돌아왔다 올망졸망하던 식탁 위에는 꽃진 자리 까맣게 탄 바나나 한 송이 말라가고 있다 오늘은 그의 예기를 들어봐야겠다 2. 시간이 촉박했던 우리는 열대를 동경했어요 열대에선 언제든 꽃을 피울 수 있잖아요 자! 배꼽이 어디일까 하고 생각해보면 알 수 있어요 꽃이 말라 떨어진 자리를 찾아야 해요 아무리 오므려 보고 긴 시간으로 메워봐도 메워지지 않던 자리 오톨도톨한 흉터가 지워지지 않은 자리 눈을 감고 만져 보면 울음소리 촉촉이 들리는 곳 그곳을 찾는 일이에요 엷은 껍질만으로 지낸 뜨거운 날들 쓴 눈물을 흘리지 않고 속에서 삭이는 일이었죠 매끄러운 듯 보이는 몸을 더듬어가면 둥근 세상을 건너온 것 만은 아니에요 몇 번의 고난이 속에서 칼금으로 접혀있어요 조심하세요 아직 눈물이 삭히지 않았을 때 이를테면 푸른 배꼽을 뒤틀어 확인하려 했다간 떫어서 아린 눈물로 울어 버릴지도 모르니까요 인내심 많은 당신 겉으로 흘리지 않고 내내 참아 얇은 뼈 하나 없이 향긋하게 굳은 가슴 한 번 열어 보세요 배꼽 흉터를 떼고 주욱 껍질을 벗겨 한 입 베어 물어요 그리고 하얀 치아로 반짝 웃어봐요 3. 꽃이 피고 질 동안 계절이 몇 번 바뀌었다 열대의 겨울이 떠나지 않는다 하지 못한 말들이 이제사 익으며 내용은 굳어버리고 마침표만 까맣게 껍질 위로 번져 나오는 저녁 오늘도 바나나를 먹지 못할 것 같다. ■당선소감 - 김효남 "후회의 단상까지도 앞으로 나가야만 해" 매일 건너는 다리가 막혔다. 낯선 길로 들어선 강변 순환도로 땅거미가 깃들 뿐인데 차들은 바쁘다. 길 위의 시간은 머무르고 싶지 않은 여백의 순간처럼 귀가하는 삶의 속도에 치여 산산히 부서진다. 이제 막 켜지는 가로등의 창백한 시선들이 너무 빨라서 서글픈 속도를 칸칸이 세고 있다. 머리 속의 뿌연 지도가 바람에 척척 접히고 교통표지판의 글씨들이 경적 소리에 놀라 날아간다. 너무 멀리 지나온 것일까? 하는 후회의 단상 까지도 앞으로 나가야만 해 불빛들은 강이 방향을 틀어 쫓아오듯 밀려오고 낯선 곳의 속도는 바람처럼 마음의 가지를 흔들어 여러 갈래의 길 목에서 머무르지 못하고 여백에는 짧은 안부의 말조차 나누지 않는다. 부족한 글을 선해 주신 중앙일보 제위께 감사드립니다.

2009-04-27

[중앙신인문학상] 시·시조 부문 당선작 "햇빛 여행"

1. 신문을 보며 벽시계를 올려다보며 하품을 한다 저쪽 벽에 혼자 서 있는 햇빛의 배경 공허한 햇살은 시계를 데리고 시간 여행을 떠난다 그가 가장 아끼는 베란다의 오렌지 나무에 입 맞추고 투명한 시간에게 금화 동전 한 닢을 몰래 건네주었다 그림자는 그것을 검게 받아먹었다 나는 세수를 하고 수건으로 물기를 닦으며 식탁으로 가 앉으며 오늘은 무엇을 해야 하나 잠시 생각에 잠긴다 식탁 위의 마른 빵 위에 이스트처럼 부풀어 오르는 햇빛 나는 빵을 자른다 수녀원에서 만들었다는 성당에서 사온 딸기잼을 빵에 발라 베어 물며 유리컵에 하얀 부레처럼 동글 부풀어 오르는 우유를 따라 마신다 나는 외출을 한다 햇살은 식탁에 홀로 앉아 한낮의 남은 귤을 더 달콤하게 했다 2. 뭐 대단히 즐거울 것도 없던 하루였지만 다 모인 저녁식사 시간은 즐거웠다 하얀 실내등 불빛 위에는 선명한 빛으로 말들이 구름 위에서처럼 피어나고 있었다 그래서 빛은 양배추 냄새가 풍기는 수프 그릇 주위로 모여 앉았다 딸가닥거리는 스푼 소리와 속삭임들이 물 잔과 접시 이곳저곳을 드나들었고 산문을 시집을 읽다 그대로 잠이 드는 내 서재 침대는 고요했다 나의 아침잠을 깨어 놓은 햇빛 커튼 사이로 창문을 열고 나간 햇빛은 바람에 서로 몸 비비고 서 있는 달개비 꽃을 한번 슬쩍 만지고 풀 뜯는 소들의 풀내음을 맡는다 이삭 위에 앉아 있던 햇빛은 새들에 의해 노래 불려지고 까만 씨앗으로 익어 갔다 더 단단해지기 위해 씨앗은 햇빛이 이끄는 데로 한참을 걸었다 그리고 어디론가 바람에 훌훌 실려 가 신석기 시대 씨앗이 희망이었듯이 짐승의 심장이 되고 인간의 숨소리가 된 햇빛 햇빛은 생명들의 흙 속으로 들어가 꿈을 꾸었다 뿌리들의 꿈은 움직이기 시작했다 조금씩 조금씩 그러는 사이 꽃대는 키를 높였다 햇살은 그렇게 누군가에게 희망이고 싶었다 시는 내게 언제나 잘 익어가고 있는 열매에 가을 햇살 같은 희망 3. 오늘 아침 산책길에 떨어진 목련꽃 봉우리를 밟아보았다 용서하라 노란 꽃 수술이 총채처럼 모여 앉아 있었다 햇빛의 웅크림을 어젯밤 바람이 마구 흔들어 놓았나 보다 노란 부리 새들이 나뭇잎에 흰 똥을 점점이 뿌려 놓은 메타쉐콰이아 숲을 지나 베란다로 들어 온 햇빛이 찻잔에 소리 없이 챙강챙강 부딪치는 내가 차를 마시는 나무에서 잠이 깬 햇빛이 새들과 노래를 부르고 있는 내가 무척 좋아하는 시간이다 그러나 햇빛 너는 내가 매일 너처럼 웃는다고 생각하니? 내가 가끔은 얼마나 슬픈지 모르지? 한 번도 그런 생각해 본적 없지? 나한테 정말 진지 해 본 적 없지? 한 번도................... 다람쥐가 풀잎 건드리는 소리에도 귀를 쫑긋이는 작은 짐승 햇빛 넌 몰랐지 그러나 나는 숱한 곳을 다닌 햇빛 너와 내가 결코 가본 적 없는 곳 미래 지금 저 둥지 속의 햇빛 둥근 알처럼 환해온다 ■당선소감 - 이서현 "어떤 시를 써야 할까?" 어떤 시를 써야 할까? 요새 적잖이 이 문제에 집중하고 있다. 나는 지금 대학 4학년에 재학 중이다. 대학원을 졸업하고 다시 학부에 들어간 것이다. 그래서 지금은 한국에 있다. 방학 땐 미국에서 체류했다. 그리고 내가 한국에서 학교 강의를 듣고 있을 때 지인께서 내 작품을 투고 하셨나보다. 당선 소식을 받고 놀랐다. 심사를 맡아 주신 심사위원분들과 관계자 여러분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 좋은 시를 쓰며 감사함 대신하겠다. 그리고 존경하고 감사하는 분이 계시다. 부족한 내 시에 언제나 아낌없는 사랑을 주시는 그리고 언제나 문학을 사랑하며 사시는 버지니아의 최연홍 교수님께 감사드린다. 지금 포토맥 강가엔 벚꽃이 피었을까? 아 보고 싶다. ■심사평 - 김호길/시인 "천부의 시인을 찾아낸 기쁨" 요즘은 한국시의 르네상스시대라서 한 사람 건너면 시인을 만날 수 있는 시대가 되어가고 있다. 그런데도 왜 한국시의 위기를 얘기해야 하는데 안타까울 때가 있다. '신춘시' 심사를 하면서 저마다 작품을 보내놓고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응모자와 한 생애를 시에 매달려서 번민하는 맑은 영혼을 생각하며 심사자의 공정한 자세를 가다듬곤 한다. 그래서 '신춘시'를 뽑을 때는 그만그만한 가작을 찾는 것이 아니라 번득이는 감각과 뛰어난 상상력을 지닌 시인으로 얼마나 오랜 세월을 혼신의 힘으로 언어를 닦아 왔는지에 초점을 맞추곤 한다. 어쩌다가 한 두 편 기발한 작품을 뽑아낸 시인이 아니라 응모한 모든 작품이 두루 고른 수준의 그 완성도에 집중하기 마련이다. 그런 의미로 이서현을 찾아낸 것은 심사위원 두 사람의 공통된 기쁨이다. '코뿔소' '천마총 말다래' '오래된 판화' '귀머거리 노인' 등 모두가 그만한 수준의 완성도를 보여주고 있지만 '햇빛 여행'을 당선작으로 뽑기로 했다. 젊은 시인의 예리한 감각이 돋보이고 한 세대를 풍미하는 유행을 따르는 명가의 제자가 아니라 자기만의 세계와 새 영토를 개척해 나가는 자세를 높이 샀다. "나는 다람쥐가 풀잎을 건드리는 소리에도 귀를 쫑긋이는 작은 짐승"에서 보여준 것처럼 그는 늘 예리한 촉각을 곤두세운 천부의 시인으로 태어날 것으로 짐작된다. '바나나 먹는 법'의 김효남과 '아버지의 북'의 박선옥도 역시 뛰어난 시인으로 보인다. 바나나를 미각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게 아니라 바나나를 통해 상상력의 지평을 넓혀가는 작업을 한 것이 돋보였고 아버지가 치시던 북을 통해 애잔한 진양조 가락을 뽑아내는 새 경지를 펼친 점을 높이 샀다. 북미주 시단에 새 출발을 하는 세 분의 신인에게 축하의 꽃다발을 드린다. ■심사평 - 배정웅/시인·미주시인 발행인겸 편집인 "시적 사유 신선하고 진지" 올해 많은 응모작품 중에서 이서현씨의 '햇빛 여행'을 당선작으로 결정했다. 어둠의 여신이 물러간 햇빛이 있는 시간은 사물들이 제자리에서 존재의 본모습으로 되돌아온다. 이 시의 화자는 자신의 일상에서 햇빛의 여정을 매우 동화적이고 몽환적인 수사로 그리고 있다. 햇빛이 그 여행을 통해서 짐승의 심장이 되고 인간의 숨소리가 되고 생명들의 흙속으로 들어가 꿈을 꾼다는 시적 상상력은 언뜻 저 인도의 경전 바가바드기타에서의 생명의 순환을 연상케 한다. 흔히 산문시가 빠지기 쉬운 언어와 언어의 이완을 잘 극복하면서 시적 사유가 신선한 느낌을 주어 당선작으로 선정되었다. 박선옥씨의 '아버지의 북'과 김효남씨의 '바나나 먹는 법' 두 편의 시는 각각 가작으로 선정했다. '아버지의 북'은 시의 전개 언어의 보법이 매우 경쾌했다. 시 속의 화자는 죽은 아버지를 그리고 있지만 마치 살아있는 아버지를 대하는 듯 시의 정경이 생생하고 절절했다. "훠이 훠이 한숨자락이 제비되어 몰아가고 시드렁시드렁 박타령까지 불러온다"와 같은 이 시의 서술은 애틋한 부녀간의 정한이 그대로 한편의 서정시를 이루고 있었다. 김효남씨의 '바나나 먹는 법'은 빈집에 돌아와 꽃자리 까맣게 탄 식탁 위의 바나나에서 그의 얘기를 듣는 형식의 시적 전개를 취하고 있다. 바나나에 빗대어 어떤 삶과 운명 같은 것을 넌지시 서술하고 있었다고 할까. 이 시에서 바나나는 어쩌면 우리 인간의 삶을 지칭하는 상징 내지 환유적 장치 일수도 있다. 시적 역량이 기대되어 선에 넣었다. 응모작품의 대부분이 신변의 평범한 일들을 주제로 삼고 있었고 시적 진술도 너무 평면적이었다. 이에 비해서 이 세 편의 작품들은 주제며 시적 상상력이 매우 진지했다. 흔히 시는 우수한 벙어리 담화라고도 말을 한다. 벙어리처럼 언어를 절제해야 하는 구조적 모순을 지니고 있다는 뜻일 것이다. 이민 생활의 분망함과 어려움 때문인지 응모작품들이 대체로 감상적인 수준으로 시적 개성이 두드러지지 않았다. 끝으로 최종심에서 논의된 작품은 유인선씨의 시조 '봄날 오후 정거장' 박신아씨의 시 '새벽이 오면' 박금숙씨의 시 '날개' 박현숙씨의 시 '아버지' 최용완씨의 시 '숭례문' 등이었음을 밝힌다.

2009-04-27

[중앙신인문학상] 단편소설 부문 당선작 "이혼남의 신혼일기"

2009년 1월1일 오늘 아침에 일어나는데 그만 허리를 삐끗했다. 오랜만에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몇 년전 군대에 있을 때 선임에게 기합받는 답시고 허리를 맞은 그 이후로 영 시원찮은 허리였는데 드디어 올 것이 왔다 . 순간 너무나 큰 고통이 밀려와 일어나지도 못하고 잠시 그대로 누워있었다. 몸을 꼼짝 할 수 없었다. 망년회로 밤 늦게 마셨던 숙취와 사무실의 새 프로젝트로 과로해서 늘어졌던 온 몸의 신경들이 허리 통증 한 방으로 '나 살려달라'고 아우성치기 시작했다. 평상시에는 몸에 붙어있는지도 의식하지 못했던 이 놈의 허리 척추뼈가 이렇게 중요한 몸의 한 부분이라니 새삼 놀라운 생각까지 들었다. 하기야 인간이라는 짐승도 척추동물로 구분되지 않는가? 허리뼈가 이처럼 중요한 기관이라는 사실을 감탄하고 있는데 남자 갈빗뼈에서 나왔다는 여자라는 종류도 중요한 뼈일까하는 궁금증이 일었다. 있을 때는 모르다가 없으면 고통스러운 여자라는 존재…특히 아내라는 존재는 더 더욱 그런 것 같았다. 있을 때는 모르다가 사라지면 고통스러운 아내라는 존재……. 합의 이혼한지 한 달이 지나면서 아내의 존재는 나에게 솔직히 고통으로만 남아있다. 말로도 표현되지 않는 궁극의 '고통'이라고나 할까. 관계를 청산하면 시원해지겠지라고 이혼서류에 도장은 찍었지만 추운 날씨와 맞물려 전혀 시원해지지 않았다. 도대체 왜 이혼했는지 의구심도 일었다. '왜 이혼을 했을까?'라는 질문을 술 마시다가 했더니 상구라는 놈은 '이혼해봐야 그 이혼한 이유를 알 수 있다'는 뭔 말하는 지 알 수 없는 개똥철학을 술취한 목소리로 외친 기억이 문득 스쳐지나갔다. 세상에 고통당하려고 발악하는 인간이 어디 있단 말인가? 이렇게 마음이 고통스럽다는 것을 알았으면 절대로 이혼하지 않았을텐데…. 마음이 휑한 것이 정말 노래 가사처럼 '총맞은 것처럼'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러다가 그 '총맞아서 구멍이 난 것 같은' 표현도 내 상황을 충분히 설명해주지 못한다는 생각이 다시 들었다. 심장에 정확히 총을 맞아 총구멍이 나면 몸은 '얼른 세상을 뜨도록' 프로그래밍되어 생각할 겨를도 없이 순식간에 죽는데 무슨 고통을 그렇게 음미할 수 있단 말인가? 내 이혼의 고통은 '총맞은 것처럼'이 아니라 '총 맞은 것보다 더'로 바꾸어야 정확한 표현이 되는 것이다. 오늘이 새해 첫날인데 이런 나를 낳아준 부모님들께 찾아 뵙고 문안 인사라도 드려야 한다는 생각으로 몸을 다시 움직여 보았다. 그렇지만 내 의도와는 정반대로 몸이 2개로 분리되어 따로 노는 듯한 기분 더러운 느낌이 요통과 함께 나를 다시 한 번 자지러지게 만들었다. 차가운 바닥에 누워있으니 이대로 내가 죽으면 아무도 나를 찾지 않을 것이다라는 고독감이 공복감과 함께 밀려왔다. 2008년 12월 31일 알람이 정신없이 울려 눈을 억지로 떴는데 이상하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가만히 그냥 그대로 누워있었다. 몸이 마치 천근만근 쇠덩어리가 된 것 같았다. 눈꺼풀이 천근만근이다란 말은 그냥 문학적인 표현일 뿐 눈꺼풀이 아니라 온 몸 전체가 너무 무거웠다. 그러나 저러나 몸을 이렇게 전혀 움직일 수가 없다니… 누가 밤새 내 몸뚱아리를 100년은 더 된 소나무에다가 이식 수술을 해놓은 것 같았다. 몸을 꼼짝달싹도 할 수가 없었다. 몸을 움직이려고 몇 번을 시도하다가 일어나봐야 할 일도 없는데라는 생각에 눈을 다시 감았다. 일단 눈을 다시 감자 내 몸이 깃털처럼 자유로워졌다. 새처럼 날아 다니는 기분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마치 영혼이 육체에서 이탈한 것 같은 환상이 눈앞에 펼쳐졌다. 아무런 어려움없이 내 몸이 누워져 있는 어두운 방 안을 떠나 밝은 햇볕이 연극 무대의 스포트라이트처럼 구석구석을 비추고 있는 거실 쪽으로 날아갔다. 화려한 조명과는 달리 너저분하게 거실 바닥에 흩트러진 옷가지와 냄새나는(모든 것이 실제처럼 생생했다) 양말들은 엄청난 조명 때문에 박물관의 예술작품처럼 보였다. 아니 마치 세상의 인간들이 모조리 유체이탈하고 남긴 옷가지들처럼 보였다. 옷은 사람의 인격 사회적 위치 그리고 자신을 표현하고자 하는 욕망을 적절하게 표현해주는 사람에게는 절대로 필요한 '도구'인데 그 도구들을 벗고 날아가버렸다는 것은 인간 이상의 존재 즉 철학이 말하는 초인이 되었다는 뜻이 아닐까. 점점 눈을 감고 공중을 날아다니는 상상이 즐거워졌다. '진작 이렇게 할 껄.' 하지만 나는 내 눈앞에 피하고 싶은 상황이나 도저히 있을 수도 없는 끔찍한 장면이 펼쳐지면 동상처럼 움직이지도 않고 그대로 선 채 눈만 감아버리는 이상한 버릇이 있었다. 아주 무기력하게 말이다. 초등학교 시절 '육성회비'라는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돈을 기한 안에 학교에 가져 오지 못해 선생님으로부터 기합 맞을 때도 고등학교 때는 학생과장이라는 사람에게 아무 이유없이 맞을 때도 대학입시 원서 넣은 곳마다 떨어지는 상황 속에서도 군대 선임상사의 무자비한 폭력이 몰아칠 때도…그리고…어렵게 아내의 뱃 속에 들어앉은 우리 아기가 이유를 알 수 없는 고열에 죽어버렸을 때도 나는 그냥 눈을 감고 마냥 무기력하게 그냥 서 있었다. '우리 아기….' 잠시 자유롭고 솜털같았던 내 몸이 '우리 아기'라는 단어가 머리에 떠오르자마자 갑자기 바닥이 보이지 않는 무저갱으로 하염없이 빠지기 시작했다. 고함과 비명들이 온 몸을 휘감더니 용수철처럼 눌러져 있던 슬픔과 절규가 이곳저곳에서 막 튀어올랐다. 그 숫자는 내가 살아온 인생 속의 모든 슬픔과 절규의 숫자와 맞먹는 것 같았다. '당신이 그렇지 뭐….' 내가 아이의 시체 옆에서 아무 말없이 눈을 감고 서있는데 아내는 그렇게 말했었다. '당신은 언제나 그렇지 뭐.' 마치 열려라 참깨같은 마법의 주문처럼 아내가 그 말만 하면 나는 괴물로 변했다. 눈에는 악어의 눈물을 한껏 품고 심줄들이 흉측하게 피부에 툭툭 나온 징그러운 괴물로 나는 변했다. 그리고는 아내에게 괴물의 생김새같은 폭력과 폭행을 보여주었다. 그 괴물이 아내한테 퍼부은 폭행과 폭언은 나중에 정신을 차리고 나의 모습으로 다시 돌아왔을 때 후회의 무게를 가볍게 해주는 놀라운 힘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아무런 책임이 없다. 아내가 부른 그 괴물이 다 저지른 일이다.' 고해성사를 마치고 나와 무거운 죄의 굴레를 벗어던진 가톨릭 신자의 기분이 바로 이런 기분일 것이다. 하지만 아내는 내 속의 이 영험한 괴물의 존재를 아마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 같다. 그래서 나와 이혼을 한 것이다. 아내가 그 괴물의 존재를 알았더라면 나랑 이혼하지 않았을 것이다. 잘못한 것은 괴물인데 왜 나하고 이혼했겠는가? "눈을 다시 감자 내 몸이 깃털처럼 자유로워졌다" 2008년 12월30일 눈을 떴다. 이상하게 어제와 똑같은 장면이 반복되는 느낌이 들었다. 미친듯이 달려도 다람쥐 쳇바퀴 속에 갇힌 것 같은 썩 좋지 않는 느낌. 어제 도대체 무엇을 했는지 전혀 생각이 나지 않았다. 가위로 싹둑 잘라 버린 듯한 시간의 끈들은 어디로 갔을까? 어제 일기의 날짜를 보니 12월 31일이라고 적혀있었다. 그리고 뭔가를 써 놓았는데 아무리 읽어도 2008년도의 마지막 날인 12월 31일날 내가 뭘 했는지 전혀 기억이 없었다. 하루 정도 틀릴 수도 있고 12월 31일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었으므로 오늘 날짜를 '2008년 12월 30일'이라고 나는 확신했다. 나는 일기장 페이지 제일 윗장에 '2008년 12월 30일'이라고 적어넣었다. 그리고 어제 적힌 '12월 31일'을 지우개로 고쳐 쓰기 위해 일기장이 놓여있던 책상의 서랍들을 말끔하게 뒤져 보았지만 지우개를 찾을 수가 없었다. 지우개는 언제나 주위에서 뒹굴다가 정작 필요할 때는 사라진다는 말이 틀린 말이 아니였던 것이다. 지우개를 찾기 위해 서랍을 뒤지다가 문득 종이 한장을 발견했는데 이렇게 적혀있었다. 합의이혼을 하시기 위해서는 법원에 비치된 협의 이혼 의사 확인 신청서 1통 호적등본 1통 주민등록등본 1통 이혼신고서 3통을 작성하셔서 협의이혼 담당자에게 제출해야 합니다. 법원에 가실 때에는 당사자가 가셔야지 대리인을 통해 신청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습니다. 당일 법원에 비치되어 있는 양식에 작성해도 되지만 '빠른 수속'(!)을 위해 미리 양식을 구해서 작성해 가져가는 것이 좋습니다…. 여기까지 읽자 마지막 줄에서 아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둥그런 얼굴 둥그런 눈 둥그런 입술…. 그런 둥글 둥글한 아내의 모습처럼 우리 결혼도 둥글둥글했었으면 좋았을 텐데…. 나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알 수 없는 분노가 스멀스멀 올라왔다. 도대체 무엇이 잘못되었단 말인가? 어릴 때부터 평범한 가정과 평범한 환경 속에서 나는 뭔가에 노력을 기울이면서 살아왔다. 구슬치기 딱지치기 당구 전자오락같은 하찮은 것들조차에도 전력투구 리스트에 올려 놓고 열심히 했었다. 열심히 무조건 열심히…. 이것이 내 인생의 좌표였다. 그렇게만 하면 내 손에 뭔가가 반드시 쥐어졌다. 그러나 결혼은 뭔가가 달랐다. 열심히 결혼생활을 하자는 어색한 표어를 걸어놓고 여태까지 열정적으로 살아온 내 인생의 방식대로 결혼생활도 잘하려고 나는 많은 노력들을 기울였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결혼은 파랑새처럼 날아가 버렸다. 완전히 시야에서 벗어났으면 포기라도 했을텐데 내가 손을 뻗으면 닿을 만한 거리에서 멈춰서서 날 한껏 약올렸다. 갑자기 허리통증이 왔다. 약이 바짝 오르자 나도 모르게 몸에 힘을 주니 통증이 왔다. 통증이 허리부터 시작해서 왼쪽 다리의 뒤를 스쳐 지나가는데 묵직한 구렁이가 내 몸위를 스쳐지나가는 느낌이였다. 도대체 언제부터 내 허리가 이랬지 생각이 나질 않았다. 2008년 12월 29일 잠에서 깼다. 침대 위엔 나 혼자만 누워있었다. 아내는 도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 아내는 언제나 내가 찾을 때마다 없다. 침대에서 일어나려는데 약간 뻑뻑한 느낌이 허리에 들었다. 침대에 앉아 정신을 가다듬으려 했는데 출렁거리는 침대의 탄력 때문에 허리의 신경이 어긋났는지 박자가 맞지 않는 나와 아내처럼 통증이 파도같이 밀려왔다. 눈물이 찔끔 날 정도의 통증이였으나 혼자 우는 것도 서럽고 이상해서 꾹 참았다. 아무리 내가 남자라도 내 눈물에 관심가져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 뼈가 사무칠 정도로 나를 서럽게 했다. 만약 내가 변사체로 발견되어도 죽은지 오랜 뒤에 썩은 냄새 풍기면서 발견되는 것은 아닐까하는 상상이 실제로 내 코를 거머쥐게 만들었다. 배가 너무 고파서 아픈 몸을 억지로 일으켜 부엌으로 갔다. 오렌지색과 베이지색이 어색하게 조화된 부엌 가구색이 눈에 무척 거슬리게 들어왔다. 부엌수납장 하나를 열어보니 형형색색의 비닐봉지가 들어앉아 있었다. 비닐봉지 겉에는 '김' '다시용 멸치' '오징어채'라는 낯에 익은 글씨들이 적혀있었다. 분명 아내가 쓴 글씨다. 아내는 도대체 어디로 간것일까? 나는 부엌을 나와 문이라는 문은 다 열어 보았다. '최 현수 최 현수.' 아내의 이름을 부르며 마치 숨박꼭질하는 것처럼 이 방문 저 방문을 열어봤지만 술래는 보이지 않았다. 크고 작은 방이 4개나 되는 이 곳에 나 혼자 내버려진 것이 확실하다는 사실이 깨달아지자 길거리에 내버려진 고아의 서러운 느낌들이 나를 샌드백처럼 두들겼다. 말로는 표현하기 복잡한 감정들이 불량배처럼 튀어나와 나를 중간에 놔두고 왕따 취급하는 기분도 들었다. 나쁜 불량배들이 나를 중간에 놓고 주먹으로 때리고 밟고 욕했다. 나는 아무 저항도 하지 못하고 버릇처럼 눈을 감고 엎드려서는 계속 아내의 이름만 외쳤다. 나도 이 세상으로 나오는데 아버지와 어머니가 만든 자궁의 방을 통과했을 터인데 아버지와 어머니의 얼굴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몇 분이 지났을까? 계속 아내 이름만 외치는데 그만 실수로 머릴 심하게 바닥에 내리쳐버렸다. 붉은 와인이 머리에서 흘러 내렸다. 이상하게 아무런 고통은 느껴지지 않고 바닥에 흘러진 피를 보면서 피는 왜 붉은 색일까 생각했다. 노랑색이나 분홍색이면 좋을텐데…. 다시 나는 한참을 엎드려 있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머리에는 더 이상 피는 흐르지 않고 바닥에는 피가 말라 눈물 땀과 함께 뒤덤벅이 되어 있었다. 처칠인가? 영국 국민들에게 피 눈물 땀을 요구한 위인이…. '초등학교때 배운 처칠이 기억나니 우습군….' 최근 일은 잘 기억이 나질 않는데 내가 초등학교 이전의 기억들은 아주 선명하게 머리 속에 떠올랐다. 아내를 만난 것도 초등학교 때부터였다. 그렇게 따져보니 아내와 나는 30년이 넘는 세월을 알고 지낸 사이였다. 30년이라는 결코 짧지 않는 시간을 서로 나눠 써야만 했던 '운명'이었던 것이다. 나나 아내 둘 다 막내로 태어나 근본적으로 나누어 쓰기를 싫어하는 성격이었는데 알 수 없는 '불가항력적 힘'은 무조건 우리 두 사람에게 주어진 무엇이든 나누어 쓰도록 명령했다. 그러나 나누어 쓰기 위해서는 서로 '약속'이라는 것을 맺어야 했었는데 사실 언제나 그 약속을 어기는 것은 나였고 그 어긴 약속을 이해하는 쪽은 언제나 아내였다. 어릴 때 나는 그런 아내를 바보같다고 매일 놀려댔었다. '이혼도 아내와의 약속을 어기는 것이 아닐까.' 씁쓸한 마음마저도 허기를 누를 수가 없어 자리에서 억지로 일어나 부엌으로 엉금엉금 기어갔다. 나는 햇반과 참치 통조림 맛김을 꺼내 주린배를 채웠다. 밥을 다 먹고 그릇을 싱크대로 가져 갔을 때 나는 너무 놀라 그만 들고 있던 그릇을 바닥에 다 떨어뜨렸다. 설겆이를 하지 않는 그릇들이 산처럼 싱크대에 쌓여 있었기 때문이였다. 어디서부터 날아 왔는지 파리 몇 마리가 공중을 붕붕거리며 날아다니고 있었다. 2008년 12월28일 '청소 어차피 할 거 나중에 한꺼번에 하지' 퇴근하고 집에 들어오면 날 아는 척도 하지 않고 집청소만 하는 아내를 볼 때마다 내가 즐겨하던 말이였다. 오랫동안 알다가 결혼한 우리 부부의 대화 길이는 알고 지낸 시간과 반비례였다. 처음에는 밤을 하얗게 새면서도 시간이 부족했던 대화는 나중에 서로 침묵의 특수임무를 띤 스파이 부부처럼 암호 냄새까지 풍기는 짧고 간단한 내용의 대화만을 주고 받았다. 대화 양도 침묵수도를 쌓는 수도승보다 더 가벼웠을 것은 안 재봐도 확실했다. 아내의 친정 어머니는 선천적으로 귀가 들리지 않아 두 모녀는 수화로 대화했다. 나같은 세상소리에 찌들은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 소리가 마치 있는 것처럼 두 모녀는 행동했다. 인생은 눈에 보이는 것만이 다가 아니라 사물 너머에는 그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두 모녀는 손짓으로 표현해주는 것 같았다. 정상인인 친정아버지가 조용히 하라고 할 때까지(내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지만) 두 모녀는 서로에게 수신호를 보냈다. 그러고 보니 췌장암으로 갑자기 세상을 등진 장모님의 장례식 이후로 말도 없이 아내가 방청소를 하는 시간이 길어진 것 같았다. 손에 빗자루를 들고 돌아가신 장모님의 영혼과 수화를 시작한 것일까? 나는 알 수가 없었다. 얼굴에 불만이 가득한 채 고개를 숙이고 진공 청소기가 있는데도 빗자루로 쓸고 걸레로 닦는 아내의 모습에서 난 점점 지치고 불평이 쌓여갔다. 왜 아내는 남편의 나와의 대화를 그렇게 거부했을까? 아내는 수많은 대화요청을 하였다고 합의 이혼을 하는 법정에서 진술을 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언제 그런 요청을 했는지 전혀 기억해 낼 수가 없었다. 내가 만약 말문을 닫았다면 더 이상 싸우기 싫다는 뜻의 무언의 휴전을 요청한 것이지 아내가 대화를 하자는 요구를 내 귀로 들어본 적 사실이 없다고 판사에게 열심히 이야기를 해보았지만 전혀 먹혀들지가 않았다. 판사는 반대로 이렇게 나에게 물었다. '아니면 이 기훈씨가 아내와 대화를 평상시 잘 했다는 증거를 제시하시요'라고…. 이런 미친 놈이…어디서 세상의 어느 누가 그런 증거를 제시할 수 있단 말인가? 살아오면서 한 번도 법정근처에도 가보질 않았었는데 이혼하면서 처음 가 본 법정의 첫인상은 '울화통' 그 자체였다. 평생 한 마디도 못하셨던 장모님과 장인 어른의 부부 금슬이 남달랐다는 사실을 눈으로 직접 봐 왔으면 아내도 대화가 그렇게 부부관계를 크게 좌우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 터인데 '대화부재'를 이혼사유로 적다니 나는 아내가 정말로 원망스러웠다. '부부관계는 눈에 보이지 않는 영혼의 화학작용'이 중요한 것이다. 그 화학작용만 있으면 대화가 그렇게 필요한 것이 아니다. 반평생을 같이 사는데 무슨 할 말이 그렇게 많을 수가 있단 말인가? 수많은 심리학자와 소위 '부부문제 상담가'들은 무조건 대화로 부부 문제를 해결하라는데 남자와 여자가 부부로서의 고유한 '화학작용'이 없는 이상 몇 년 몇 백년을 대화해도 서로 선문답이 될 수 밖에 없다. 그 전문가들은 자신들이야 말로 부부문제에 정통하다 하더라도 절대로 부부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다. 의사가 환자가 없으면 병원문을 닫는 것처럼 부부 문제가 없다면 그 놈의 정통한 '부부 문제 전문가'들은 뭘 해먹고 살겠는가? 다 말짱 거짓말이다. 지금 일기를 쓰면서도 내 손이 분노로 부들부들 떨린다. 아내가 조금만 그 '화학작용'이 잘 일어나게 비밀공식을 나와 같이 인내심을 가지고 버텼더라면 이렇게 이혼하지는 않았을텐데…. 아내가 원망스러웠다. "대화부재를 이혼사유로 적다니 나는 아내가 정말로 원망스러웠다" 2008년 12월27일 오늘은 전화소리가 울리는 바람에 잠자리에서 깼다. 전화 벨소리는 아내가 좋아하는 클래식 음악으로 맞춘 것인데 평상시 불편하게 간섭해 들어오는 전화의 특성상 편안한 클래식 음악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고 나는 아내에게 누누이 강조했었다. 아내는 그 때마다 무슨 클래식음악 동호인협회 회장이라도 되는 양 전화 벨소리를 그대로 하자고 고집을 부렸다. 이렇게 사사로운 전화 벨소리도 아내와 서로 의견 일치를 볼 수 없다니 한심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안타까운 생각도 들었다. 나의 단잠을 깨운 전화벨의 주인공은 남자였다. '아픈데는 괜찮느냐'는 말로 다짜고짜 통화를 시작한 그 친구는 자신이 누구인지도 밝히지 않고 '언제 회사는 복귀할거냐?' '복귀할 수 없다면 도대체 앞으로 뭐 먹고 살거냐?' 그리고 '이혼해서 마누라도 없을 텐데 밥은 어떻게 해 먹느냐?'는 내가 대답할 수 없는 질문만 잔뜩 늘어놓았다. 내가 그의 질문에 머뭇거리며 바로 대답을 하지 못하자 또 다시 알수 없는 소리를 궁시렁 거리더니 잘 지내라는 통상적인 안부만 남기고 전화를 역시 일방적으로 끊었다. 침대 옆 아내의 화장대 위에 놓인 성인(成人)의 탯줄같은 핸드폰은 배러리가 나갔는지 오래 전부터 눈을 감은 애완동물처럼 죽은 듯 가만히 놓여 있었다. 나는 씁쓸하게 웃었다. 알 수 없는 인물의 무례한 전화 한 통화가 내가 아직도 이 세상에 잊혀지지 않고 존재한다는 확인은 시켜준 고마운 전화가 된 셈이였기 때문이다. 침대옆 벽에 붙은 결혼 사진에는 아내와 내가 세상 행복을 다 차지한 듯 웃고 있었다. "왜 나혼자 여기 있지?" 저렇게 사진 속에 웃는 아내는 도대체 어디로 갔단 말인가? 오프닝 행사 때 문 앞에 늘어진 테이프처럼 누군가의 가위에 의해 싹뚝 잘려져 버린 것 같았다. 머리를 싸매고 시간의 띠가 어디에 놓여졌나 고민하는데 배에서 꼬르륵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동시에 덮고 있던 이불과 침대가 놓여진 방 전체에서 퀘퀘한 생선 썩은 것같은 악취가 코끝을 진동했다. 신선한 공기가 마시고 싶어 허기와 악취로 뒤덮힌 방안을 둘러보는데 창문에는 두껍고 짙은 색의 커튼이 철통수비를 자랑하는 경호원처럼 떡하니 창문전체에 늘어뜨려져 있었다. 도대체가 밖이 밤인지 낮인지 구분이 안될 지경이였다. 나는 침대에서 뻣뻣해진 허리를 억지로 끌고 창문 곁으로 다가갔다. 커튼을 잡자 안개처럼 먼지가 일어났다. 숨을 잠시 멈추고 육중한 커튼을 열어젖히자 태고의 신비가 간직된 아파트 빌딩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누가 저렇게 깨끗하게 닦았는지 궁금할 정도로 광이 나게 닦여진 창문들은 햇빛을 다이야몬드 모양으로 화려하게 반사시키고 있었다. 나는 강렬한 조명 아래 대사를 잊어버린 연극배우처럼 멍하니 창문 밖을 내려다 보았다. 분명히 저 아파트 빌딩 안에는 나같은 사람들이 꼼지락대며 웃고 울고 먹고 잠자면서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대부분이 가족이라는 공동체를 만들어 그 희노애락을 공유하고 있을 것이다. 갑자기 고독이 밀려왔다. 수일을 굶은 거지아이 하나가 거리를 비틀거리며 걷다가 우연히 고급식당을 발견하고 살금살금 다가가 식당안을 몰래 들여다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잃어버린 시간의 끈만 찾을 수 있다면 고독 때문에 갈라진 내 마음의 틈을 어떻게 동여맬 수 있을텐데…. '그런데 왜 난 이 아파트에 혼자 내버려져 있을까?'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2008년 12월 26일 온 세상이 얼어붙었는지 거대한 냉장고 안에 누워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살을 에는 추위가 잠 속에 있는 나를 흔들어 깨웠다. 엉금엉금 침대에서 일어나 방문을 열고 거실로 나갔다. 거실로 들어서자 마자 한동안 아무도 여기에 오지 않았다는 생경함이 휘익하고 내 얼굴을 갈겼다. 배가 고파져 악취가 풍기는 거실 옆 부엌으로 가서 수납장의 서랍들을 일일이 열어보았다. 서랍에는 비닐봉지들만 수북히 있었는데 누가 먹었는지 봉지 안에는 반찬만 약간 남아 있었다. 밥통에는 밥이 하나도 없었다. 김이 든 봉지하나를 잡고 허기진 도둑같이 허겁지겁 입에다 털어넣었다. 맨 김들이 목구멍에서 낙하산처럼 펼쳐졌다. 목이 콱 막혔다. 가슴을 치면서 캑캑거리면서 주위를 두리번 거리다 냉장고 옆의 냉수통이 눈에 들어왔다. 싱크대 설거지 쌓인 곳에서 컵을 꺼내 냉수를 받아 벌컥 들이켰다. 얼음같은 냉수가 김에 막힌 목구멍을 시원하게 뚫어내렸다. 목구멍이 뻥 뚫리며 허기도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다. 눈을 감고 서서 오늘이 몇 일인지 왜 내가 집에 혼자 있는지 생각하려 끙끙대 보았다. 노력만큼 기억나지 않아 금새 포기하고 집안을 샅샅이 여행하기로 마음먹었다. 부엌에서 나왔다. 거실에는 커다란 LCD 텔레비전이 이 세상과 저 세상을 이어주는 입구처럼 서 있었다. 텔레비젼 안 속으로 들어가보고 싶은 마음이 들어 손가락 끝으로 화면을 꾸욱 눌러보았지만 금새 차가운 거절을 보내왔다. 어떻게 하면 텔레비전을 틀 수 있을까는 궁금증이 일어 텔레비전 앞과 뒤를 꼼꼼하게 살펴보았는데 익숙하지 않는 자그마한 버튼만이 눈에 들어왔다. 버튼들을 누르려고 하다가 재미가 사라져 나는 다른 곳으로 눈을 돌렸다. 검은색 가죽소파 앞에 놓여진 커피 테이블 위에는 많은 종이들이 어지럽게 널려있었다. 나는 소파에 앉아 누런 종이봉투 하나를 집어 그 안에 든 종이들을 꺼내보았다. 종이에는 '이혼신고서'라고 적혀있었다. 이혼이란 단어가 낯설게 느껴지면서 언제나 내 주위에 있었던 아내의 행방도 갑자기 궁금해졌다. '도대체 이 마누라는 어디로 간 거야?' 은근슬쩍 화가 났다. 이렇게 춥고 배고픈 곳에 나를 내버려두고 가버리다니… 한편으로는 아내와 결혼식을 올린지가 엊그제 같은데 혼자 어디 나갔다 사고라도 난 것이 아닌가는 생각도 들었다. 아내는 넉넉한 몸집이 어울리지 않게 자그마한 것에 화들짝 잘 놀라는 타입이었다. 연애하는 기간 동안 놀릴 때마다 번번히 걸려들었었다. 몰래 아내의 뒤에서 눈을 가리다가 아내를 기절의 문턱까지 보낸 적도 있었다. 아내는 독서하는 걸 무척 좋아했다. 식사를 할 때도 책을 놓치않아 잔소리를 얼마나 했는지 모른다. 한 번 정신을 차리게 해줘야지 벼르고 있다가 하루는 밥을 먹으면서 책을 읽는 아내 몰래 국 그릇과 소금 그릇을 바꿔 놓은 적이 있었다. 그런데 맛소금을 한 숟가락 그대로 삼키자마자 아내는 갑작스럽게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켰다. 간질병 환자처럼 입에서 거품같은 것이 나오고 입술이 붓고 얼굴에는 붉은 반점들이 튀어나왔다. 얼마나 놀랐던지 나는 맨발로 아내를 업고 집에서 800미터나 떨어진 병원까지 단숨에 달려갔다. 응급치료를 끝낸 응급실 담당의사는 아내가 한 가지 음식을 과도하게 섭취하면 호흡기와 입술이 붓는 특이한 알레르기 환자라고 진단내리면서 그렇게 크게 걱정은 하지 말라고 했다. 졸지에 명란젓처럼 부은 입술을 가지고 응급실 한 구석에 놓인 침대에 누운 아내를 바라보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계속 아내를 바라보는데 시야가 흐려졌다. 결혼하고 아내 앞에서는 한 번도 울지 않았던 내 눈에 갑자기 눈물이 흘렀던 것이다. 바로 그 때 정신을 차린 아내가 굉장히 놀란 얼굴로 눈물 글썽이는 나를 바라보았다. 내성적이고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나였기에 얼굴이 붉어질 정도로 부끄러워졌다. 아내는 조용히 병원 침대에서 일어나 장모님과 수화할 때처럼 능수능란한 자신의 손으로 내 눈물을 닦아주려 했다. 나는 화들짝 놀라며 아내의 손을 뿌리쳤다. 사내는 절대로 울면 안된다는 엄격했던 가정 교육이 생각났다. '무거운 너 업고 병원에 달려 온다고 흘린 땀이야!' '치…누가 뭐랬어? 뭐가 눈에서 흐르길래 닦아주려 했지.' 그러면서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째려보았다. 아내가 무척 사랑스러웠다. "아내의 종교는 여행교였고 그 종교의 경전은 세계지도책이었다" 2008년 12월 25일 아침에 일어남과 동시에 화장실로 갔다. 화장실 안이 뭔가 낯설었다. 수건들이 바닥에 어수선하게 널려져 있었다. 어차피 더러워보이는 수건이었지만 발에 밟히면 더 더러워질 것같아 수건 사이로 걸어나갔다. 변기 바로 옆에는 세탁기가 놓여있었다. 세탁기 문이 열려진 틈에는 옷들이 전쟁의 사상자처럼 어지럽게 걸려있었다. 집 안에는 나 밖에 없으므로 분명 저건 나의 작품 같은데 도대체 어떻게 옷을 벗었길래 저런 예술을 보여주는지 도대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옷가지를 주섬주섬 세탁기 속에 넣고 문을 닫았다. 빨래를 해야겠다는 마음에 세탁기 윗부분에 달린 버튼 하나를 눌렀다. 세탁기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조심스럽게 눌렀던 버튼 옆의 버튼을 눌러도 세탁기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세탁기가 고장이 났나 세탁기를 손바닥으로 쳐봐도 세탁기는 관심 하나 가져주지 않았다. "최현수! 이거 왜 이래? 세탁기가 작동을 안해." 나도 모르게 아내를 불렀는데 아내도 세탁기 같았다. 화장실에서 나와서는 집안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면서 아내의 이름을 불렀다. 깊은 산 속의 메아리처럼 내 목소리가 울렸다. 나는 화가 났지만 이상하게도 머릿속은 뿌옇지만 그냥 편안했다. 거실 유리창으로 보이는 회색빛깔의 하늘과 같았다. 집안의 모든 문들을 열기 시작했다. 문을 열다가 부엌과 화장실 중간의 작은 방안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방 중간에는 작은 아기침대가 놓여있었다. 구름같이 폭신폭신해 보이는 귀여운 곰 모양이 그려진 이불이 한 번도 사용한 적이 없는 듯 반듯하게 침대위를 덮고 있었다. 마치 감히 근접할 수 없는 신령한 물건을 만지듯이 손바닥으로 이불보 위를 쓸어내렸다. 마음 한 구석이 싸해져왔다. 침대 위에는 원형으로 장난감 말들이 한결같이 앙징맞은 얼굴을 하고 매달려 있었다. 손으로 툭치자 음악소리가 은은하게 흘려나오면서 움직였다. 벽 한쪽에는 짙은 체리색의 서랍장이 놓여있었다. 서랍장 위에는 나와 아내의 얼굴이 찍혀진 사진이 담긴 액자가 놓여 있었는데 액자의 색깔과 서랍장의 색이 인위적으로 맞춘듯 아주 잘 어울렸다. 아내는 예술감각이 있는 여자였다. 그와 반대로 나는 예술감각은 커녕 예술의 예자도 모르는 무미건조한 성격을 가진 남자였다. 아내는 사계절이 매번 바뀔 때마다 음악 콘서트나 뮤지컬 관람을 해야만 직성이 풀렸다. 뮤지컬은 집중해서 구경하면 어떻게 돌아가는지 이해가 되어 그래도 아내와 같이 관람하기 괜찮았으나 클래식음악을 듣는 콘서트는 잠잘 때나 졸 때 코를 크게 고는 나로서는 정말 앉아있기 힘든 공연이였다. 이런 나의 사정을 알고도 번번히 아내는 콘서트 티켓을 예매해서 매번 우리 부부는 서로 티격태격댔다. '도대체 몇 시간 동안 어떻게 그런 컴컴한 곳에서 알지도 못하는 음악을 듣고 있어야 하냐?'고 항의을 해도 아내는 아랑곳하지 하고 내 등을 밀면서 공연장으로 끌고갔다. 공연장 안에는 오케스트라 전체가 바이얼린 첼로 등등의 고문 기구를 준비해놓고 나를 꼼짝달싹하지 못하게 좌석에 앉히고는 절대고통 속으로 나를 밀어부쳤다. 그나마 좌석이 줄 맨끝에 배정되었으면 중간에 뛰쳐나갈 수 있었지만 샌드위치의 고기처럼 정중간에 앉게 되는 날에는 공연이 끝날 때 쯤에 난 반미치광이가 되었다. 한번은 아내에게 상대 배우자의 배려라고는 코딱지도 없는 그 엄청난 관람열정의 근거가 도대체 무엇인지 심각하게 물어본 적이 있었다. 그때 아내는 귀가 들리지 않는 장모 때문에 한 번도 어릴 때 가보지 못한 그런 공연들에 대한 보상심리 때문이다라고 대답했다. 나는 아내에게 그런 보상심리 때문에 내가 보복심리가 생긴다고 맞받아치자 아내는 그 사람좋은 웃음으로 목젖이 보일 정도로 함박웃음을 보여줬다. 나는 아내의 그 함박웃음이 너무 좋았다. 아내는 말보다 이런 행동들로 사랑을 나에게 전해주었다. 2008년 12월24일 "어이구 이놈아 어쩌다가 그렇게 됐누…." 전화기 안의 목소리는 거의 통곡소리였다. 이야기는 하지 않고 계속 울먹이다가 전화기를 손에서 떨어뜨렸는지 갑자기 통화가 끊겨버리는 불상사가 벌어지기까지 했다. 상대방이 누구인지 내가 물어볼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없이 일방적으로 벌어진 사태였다. 다시 전화벨이 울렸지만 나는 받지 않았다. 받을 수가 없었다. 익명의 상대에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녀의 말을 가만히 듣는 일 밖에 없는데 지금 내 기분이 가만히 상대방의 말을 듣고 있을 기분이 아니였기 때문이였다. 머리 속이 하얗게 아무 기억도 나지 않고 생각하려 해도 자꾸 기억의 미꾸라지들은 내가 서있는 반대편 기억의 강 저쪽으로 헤엄쳐가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전화소리는 나에게 끈질지게 매달였다. 나는 눈을 감고 귀를 막았다. 전화벨 소리가 멈추자 고장난 수도꼭지의 물처럼 고요가 집안 전체에 흠뻑 흘려내렸다. 눈을 서서히 뜨자 갑자기 아내가 내 눈 바로 앞에 말없이 나타났다. 나는 너무 놀란 나머지 다시 눈을 감고 조심스럽게 다시 천천히 엘리베이터의 문처럼 눈을 떴다. 아내의 모습은 연기처럼 사라지고 없었다. 순간 다리에 힘이 빠져 나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팔로 다리를 끌어안고 머리를 다리 사이에 넣어 암흑의 공간 속으로 들어갔다. 아내는 어디 가버린 것이 아니라 내 곁에 맴돌고 있었다는 사실이 깨달아졌다. 내 마음을 여는 순간 나타나고 내 마음을 닫는 순간에 사라져 버리는 영적존재가 되어 버린 것이다. 아내는 공간적 제약을 완전히 벗어난 자유의 영혼이 되어 버린 것이다. 지긋지긋하고 냄새나는 이 공간을 마음만 먹으면 거부할 수 있는 초능력자가 되어버린 것이다. 나는 암흑 속에서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덜컥 겁이 생겼다. 그런 다른 차원의 사람이 되어버린 아내가 차원 낮은 내 곁에 계속 있어줄 것인가 하는 일종의 두려움같은 것이였다. 내가 생각해도 나는 이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구제불능자가 되어 버린 것 같았다. 사람은 사실 엄연히 따져 보면 엄마의 뱃속에서 태어나자마자 절대로 혼자 있을 수 없다. 영적이든 육적이든 나말고 상대방이 반드시 내 주위에 존재해야 정상적인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홀로 버려질 때 자신의 목숨까지 스스로 끊어버릴 정도의 공포가 두려움이 몰려오게 되어 있다. 그 공포와 두려움은 가공할 만한 에너지로 변해 한 사람을 무시무시한 괴물로도 만들 수 있다. 머리에는 남들에게 상처만 줄 거대한 상아같은 뿔이 돋아 있고 모든 일에 절망과 고통만을 볼 수 밖에 없는 붉은 눈과 절대로 사랑스런 키스를 할 수 없는 저주와 분노의 불을 뿜어내는 날카로운 이빨의 입을 가진 도움의 손길도 구할 수 없는 뾰족한 손톱이 박힌 그런 괴물로 말이다. 입에서 입김이 나올 정도로 소스라칠만한 한기가 온 몸을 휘어 감싸기 시작했다. 도대체 나에게 눈꼽 만큼의 소망이 남아 있기라도 하는 걸까? 누가 이런 나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까? 바닥을 알수 없는 깊은 영혼의 심연 속에 곤두박질 치는 나에게 생명줄을 던져줄 손길은 과연 누구일까? 수 만 가지 질문들이 틀어놓은 거대한 환풍기의 바람처럼 불어왔다. '난 혼자 살 수 있어'라고 거짓말을 해대는 교만한 인간들의 면전에 오물을 퍼붓고 싶은 마음이 울컥 솟아올랐다. 나는 고개를 들고 알 수 없는 비명을 질러댔다. 주먹으로 보이지 않는 거짓말쟁이들의 얼굴을 피멍이 들도록 두들겨 패기까지 하였다. 정신없이 공중에 폭력을 흔들고 고함을 쳐대다가 방안으로 다시 들어가 침대 위에 대자로 누웠다. "여보…" 아내가 한 없이 그리웠다. 그리고 다시 눈을 감고 잠을 억지로 청했다. 꿈 속에는 반드시 아내가 있으리라는 확신 속에서…. 2008년 12월 23일 '도대체 뭐였더라….' 아내가 꿈 속에서 나왔는데 무슨 옷을 입고 있는지 무슨 행동을 했는지 아내를 보면서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머리속에서 가물가물 정확하게 생각이 나질 않았다. 요즘에는 머리속에 가물거리며 춤추는 기억들이 나만 초대하지 않고 저희들끼리 무도회를 제대로 하는 것 같았다. 나도 고집이 있는지라 생각도 나지 않는 기억초대장을 억지로 보내달라고 하지 않기로 했다. 잊는다는 것이 저주가 아니라 가만히 들여다보면 행복일 때가 많이 있다. 아내에 대해 분명히 기억이 나지 않는 것들은 어쩌면 나와 아내의 관계에 행복을 가져다 주는 고마운 일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아졌다. 기분이 좋아지면서 지기개를 활짝 펴니 마치 내 등에 날개가 생겨나는 착각에 빠졌다. 어디든지 내가 원하는 곳으로 날아갈 수 있는 빛나는 황금빛의 깃털이 넘실거리는 아름다운 날개가 내 몸에 생겨난다는 착각이 시간이 흐르자 점점 현실로 눈앞에 다가왔다. 나는 여행을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아내가 워낙 여행을 좋아해서 억지로 가자는 대로 질질 끌려다닌 적이 많았었다. 아내는 평상시 약골이라는 소리를 달고 다녔는데 앓고 있던 모든 병들이 여행 가기 전에 반드시 회복되어 여행 중에는 절대로 발병하지 않다가 여행을 다녀오면 기가 막히게 일 초 일 분의 착오없이 아프기 시작하는 특이한 체질을 가졌었다. 아내가 가장 감명깊게 읽은 책은 '세계지도책'이었다. 그 중에서 각 나라의 지리 풍속을 큼지막한 사진과 함께 실은 세계지도책을 너무나 좋아해서 침대 머리 맡에 두고 잠자리에 들 정도였다. 아내가 세계지도책을 펼 때마다 마약에 취한 사람처럼 눈의 동공들이 팽창되었다. 옆에서 잠을 잘 때도 세계 각국의 언어를 잠꼬대로 입에서 중얼중얼거렸다. 아내의 종교는 여행교였고 그 종교의 경전은 '세계지도책'이었다. 인터넷을 켜도 구글 지도만 들여다 보았다. 평범한 회사원인 나의 월급과 휴가가 아내의 그 가공할 만한 여행벽을 서포트해주지는 못했지만 꼼꼼한 가계부 관리를 통해 꽤 많은 곳을 여행할 수가 있었다. 아내와 함께 한 여행 중에 가장 인상깊은 곳이 러시아였다. 눈으로 덮힌 광활한 대지와 육중한 역사의 무게가 함께 느껴지는 곳으로 여행을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던 나도 침묵수행에 들어가는 수도승처럼 엄숙하고 장중한 마음으로 여행에 임하게 된 곳이였다. 러시아란 나라의 전체 분위기가 성스럽다거나 종교적인 영험함으로 넘치진 않았지만 역설적이게 관광 가이드가 데려가는 곳은 러시아 곳곳의 관광명소는 죄다 커다란 성당들이었다. 경찰관 없는 경찰서나 의사 없는 병원을 둘러보는 기분으로 하나같이 웅장한 성당들을 바라보면서 모든 권력들이 세월에 묻혀 사라지고 없어지더라도 오로지 성당만이 그 자리에 남는다는 엄숙한 진리를 눈으로 직접 확인하게 되었다. 아내는 주위에 아무도 읽어본 사람이 없는 유명한 '제목'의 러시아 소설들을 여행 내내 언급하면서 내 눈에는 똑같이 보이는 눈쌓인 광경들을 디지털 카메라의 메모리 용량이 차고 넘치도록 사진을 찍어댔다. 눈 속의 아내는 말 그대로 눈부시게 빛이 났다. 눈과 얼음에 반사되는 빛의 조명 때문에 더욱 더 화려하게 빛이 났다. 아내가 러시아로 가서 러시아가 화려해진 것이 아니라 아내 때문에 러시아가 더욱 더 화려해진 것이다. 아내가 원한 것이 이것이 아니였을까? 일상적인 생활 속에서는 도저히 발견할 수 없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이 경이로운 변화를 절실하게 원한 것이 아니였을까? 아내에게는 여행이야말로 신 앞에 엄숙하게 드리는 제사와 예배였던 것이 아니였을까? 활활 타오르는 불 위에 올려진 그릇 속의 물이 끓어올라 피어오른 깨끗한 수증기들이 모인 순정의 영혼이 아내의 제사속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을까? 2008년 12월 22일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 아무 생각없이 반사적으로 거실로 나가 TV를 켜고 욕실로 가서 칫솔질을 하려고 둘러보니 세면대 위에는 칫솔이 달랑 하나 놓여져 있었다. 칫솔이 하나밖에 없다는 것은 집 안에 나만 홀로 있다는 의미다. 부부싸움을 하거나 여행을 가거나 아내는 반드시 그 어떤 것보다 칫솔을 챙기기 때문이다. 아내에게 칫솔은 이빨을 닦는 기구가 아니라 어떤 공간과 시간에 자신이 어떻게 존재하는지 알려주는 표지판같은 것이였다. 아내가 보이지 않는데 칫솔이 있으면 잠시 가까운 데 갔다 돌아오겠다는 표시이고 아내는 보이는데 칫솔이 보이지 않으면 어디 멀리 다녀온 표시이고 아내와 칫솔이 함께 보이지 않으면 꽤 오랫동안 집을 비우겠다는 표시이니 한동안 아내를 볼 수 없을 것이다. 치솔 뿐만 아니라 치약 튜브도 어떤 의미를 전달해주었다. 튜브에 윗부분부터 치약을 짜는 아내의 손자국이 없었는데 그건 아내가 떠난지 오랜 시간이 지났다는 것을 의미했다. 사각사각 칫솔질을 하다가 기분이 갑자기 나빠져서 칫솔질을 그만두고 물로 입을 헹궤내는데 귓속에서 계속 사각사각하는 칫솔질 소리가 들렸다. 사각사각. 사각사각. 환청치고는 굉장히 기분나쁜 소리가 아닐 수 없었다. 물로 입을 헹구는데 우웩 헛구역질이 생겼다. '왜 난 아내와 칫솔과 치약 짜는 방법을 가지고 매번 다퉜을까?' 정작 싸움을 한 당사자 중에 내가 포함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타인들의 부부싸움을 구경하는 제 삼자처럼 전혀 이해가 되질 않았다. 오늘은 생각을 조금만 깊게 해도 머리 위에 누가 쩡쩡 망치질 하는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사각사각 우웩 쩡쩡…사각사각 우웩 쩡쩡…작으면서도 규칙적이고 날카롭게…사각사각 우웩 쩡쩡…사각사각 우웩 쩡쩡…사각사각 우웩 쩡쩡…사각사각 우웩 쩡쩡…사각사각 우웩 쩡쩡…작으면서도 규칙적이고 날카롭게 쉴새 없이 내 머리속을 울렸다. 너무 괴로운 나머지 나는 두 손을 쥐고 공중을 향해 소리쳐댔다. 여자아이들이 가지고 놀던 인형 머리를 뽑는 것처럼 손으로 내 머리를 뿅하고 뽑아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두 손으로 머리를 잡아 당겨 보았지만 내 힘이 약한지 아니면 목뼈가 강한지 머리가 뽑히기는 커녕 얼굴에 피와 열이 화악하며 끓어올랐다. 안압까지 오르고 이빨 사이로 비명이 풀피리처럼 흘러나왔다. 있는 힘껏 머리를 위로 당기다가 눈가에 눈물이 고여 흘려내리자 덜컥 겁이 났다. 손의 힘을 확 빼버리자 새총 위의 고무줄이 튕기듯이 그만 우스꽝스럽게 욕실바닥에 엉덩방아를 찧고야 말았다. 누가 나의 모습을 보지 않았을까 쑥스러움이 일었다. 뭔가 잡고 어정쩡 일어서려는데 그만 변기 속에 손을 깊숙이 담궜버렸다. 손끝에 차가운 액체의 감촉이 등의 혈관으로 다시 타고 쭈빗한 을씨년스러움으로 올라왔다. 손을 급하게 빼다가 또 다시 몸의 중심을 잡지 못해 비틀거렸다. 다 같은 수돗물인데 변기 속의 물에는 왜 그리 기겁을 하게 만드는 지 알 수 없었다. 다 같은 여자인데 유독 아내의 말과 행동에 남편들이 다 기겁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어떤 여자가 야시시한 옷을 입으면 침을 흘리다가 아내가 똑같은 옷을 입으면 기겁을 한다. 아내 아닌 여자가 관능적인 말을 하면 그 말을 되새기면서 흠뻑 빠지다가 아내가 똑같은 말을 하면 벌컥 화를 낸다. 이 남자들의 이중 잣대는 결혼식 때 주례인 앞에서 하는 결혼서약과 함께 결혼생활 내내 철저히 맹세된다. 나는 손을 수건으로 닦으면서 욕실을 나왔다. 거실에서 스산한 바람이 용솟음친다. 뼈 속 깊숙히 느껴지는 허기와 함께 지구의 마지막 날 심판대에 선 것과 같은 공포도 함께 밀려온다. 지구 위에서 나에게 주어진 한정된 시간 동안 아내와 치솔하나 가지고 싸움질한 벌로 내 영혼을 영원토록 태워 버릴 격렬한 지옥불이 느껴지는 공포였다. 2008년 12월 21일 잠자는 시간이 점점 길어진다. 아니 눈뜬 시간이 점점 짧아진다는 말이 더 정확하다. 꿈 속에서 펼쳐지는 내 인생의 영화는 필름의 보존상태가 양호하지 못한 듯 내가 보기에도 무척 거친 화질의 화면들로 가득 차 있었다. 뚝뚝 끊겨지는 화면과 누가 누구인지 알 수 없는 등장인물로 인해 주인공인 나도 스토리 연결이 전혀 되지 않았다. 나는 무엇 때문에 이 영화에 출연을 결정하게 된 것인지. 매니저의 강권에 못이겨 얼떨결에 출연하게 된건지 전혀 알 수 없었다. 내가 출연하고 있는 이 영화의 장르가 액션/스릴러인지 코메디물인도 영 감이 잡히지 않았다. 어릴 적에는 코메디였다가 성인이 되어서는 액션/스릴러로 변하는 중간중간 멜로가 섞이는 짬뽕 스토리가 영화를 한층 더 어렵게 만들었다. 머리가 생각만 하면 아파왔다. 내 인생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이 담긴 시간은 정확한 나이가 생각나지 않지만 내가 아주 어릴적이었다. 동네 쓰레기장에 버려진 연탄재를 성처럼 쌓아놓고 전쟁을 벌이는 장면이였다. 그 당시에는 다들 연탄을 난방재료로 쓰기에 쓰레기장에는 연탄재들이 엄청나게 버려져 있었는데 나와 동네 코흘리개들은 대장의 지휘 아래 그 엄청난 연탄재들을 성처럼 잇고 견고하게 쌓았다. 성이 일단 건축되면 다들 일사불란하게 연탄재를 손에 쥐기 쉽게 잘게 부수었다. 연탄재가 잘게 준비되면 두 편으로 나뉘어져 각각의 성에서 재로 뒤덤벅이 된 얼굴과 비장한 눈빛으로 공격준비를 기다렸다. 참모들의 작전회의가 끝이 나면 돌격신호와 함께 전쟁이 시작되었다. 모든 효과음과 비명은 생생하게 아이들의 입에 흘러나왔다. 연탄재가 발생시키는 먼지들은 실제 전쟁포화에서 발생된 연기를 방불케했다. 비오듯이 쏟아지는 연탄재 속에서 쓰러지는 놈들은 영화의 주인공처럼 슬로우모션으로 멋들어진 연기력을 보여주었다. 적진에서 쓰러진 아군들을 구출하기 위한 전우애 넘치는 장면들도 곳곳에서 연출되었다. 휴머니즘 넘치는 이 전쟁은 해가 중천에 있을 때 시작되어 주위가 어둑어둑해져 더 이상 전쟁을 치룰 수 없게 되었거나 아니면 엄마가 밥 먹으러 집으로 들어오라는 소리가 들려야 겨우 끝이 났다. 전쟁포로처럼 귀를 잡혀 집에 끌려가면서도 다시 쓰레기장 주위를 맴돌면 혼이 난다는 엄마의 엄명 속에도 누구 하나 그 말을 따르는 아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다음날 군대소집을 하지 않아도 약속이나 한 듯 자원병처럼 한명도 빠짐없이 쓰레기장에 다시 모습을 나타냈기 때문이다. 모두들 어릴때부터 전욕(戰慾)이 불타고 있었던 것이다. 영화의 전반부는 이렇게 액션이 넘실대는 동네 골목 전장에서 익사이팅하게 시작되었다. 그 이후로는 연탄재의 연기는 없어졌지만 더 처참한 전쟁들이 연속적으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초 중 고 대학교에서는 공부와의 전쟁이 벌어졌다. 소소한 시험전쟁과 큼직한 입시전쟁으로 수많은 전우들이 나가떨어졌다. 억지로 그런 전쟁에서 살아남자 진짜 군대에서 날 현역으로 불렀다. 군대에서는 실제 전쟁보다 더 혹독한 전쟁훈련들이 벌어졌다. 인생영화의 수많은 격전 속에서 단련된 나의 호전적인 성격도 현역생활은 참기가 무척 힘들었다. 힘든 군대생활이 나의 전투력을 완전히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제대를 하고 나서는 취직 전쟁터로 투입되었지만 이미 전투력을 상실한 터라 비실대는 방황이 시작되었다. 완전히 쇠잔한 육체로 후방의 야전병원에 전의를 상실한 채로 누워있을 때 아내는 나이팅게일처럼 나를 간호해주었다. 아주 어릴 적부터 알고 지내어 이성이라기보다는 친척같은 느낌이 있었지만 아내의 간호를 통해 나는 영혼까지 소생되는 회복을 맛보았다. 그래서 다시 한 번 자신감과 용기를 가지고 인생 격전지 중심부에 투입되었다. 새살로 굳은 살이 돋아나듯 온 몸이 철갑으로 변해버린 나에게 거칠 것이 없었다. 그 어떤 어려움도 인생 앞에 내 무릎을 꿇게 만들수는 없었다. 아니 천지개벽할 어려움이 몰려오면 몰려올수록 나는 점점 더 강해졌다. 마침내 극심한 경쟁률을 뚫고 취직이 되었을 때 나는 이 인생극장의 클라이막스 장면을 아내와의 결혼식으로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정말 꿈에서 깨어나고 싶지 않고 그대로 죽고 싶은 황홀함의 결혼식이였다. 2008년 12월 20일 기분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몇 시간 동안의 시름 끝에 TV를 켤 수가 있었기 때문이였다. 힘들게 다시 볼 수 있게된 TV화면들이 나에게 더 깊은 기쁨과 행복을 가져다 주었다. 화면에는 화려한 의상을 입은 출연자들이 뭐라고 웃으면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주의깊게 듣지 않아 무슨 말을 하는 지는 이해가 가질 않았다. "여보. 저 사람이 방금 뭐라 그랬어?" "…………." "부부끼리 TV에 출연하니 참 보기 좋네." "…………" "우리도 나중에 저기 나가자. 할 말이 많을 거야." "…………." 내가 만약 TV에 아내와 같이 나간다면 도대체 무슨 말부터 할까? 요즘에는 머리 속으로 뭔가를 계획하는 것이 힘들었다. 그냥 물 흐르는 대로 의식을 나룻배처럼 띄우는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하면 모든 것이 평화로워졌고 편안해졌다. 난 언제나 구름 위에 몸을 띄운 것 같은 편안한 느낌이 마음에 들 때 인생의 중요한 결정을 내렸다. 아내에게 처음으로 프로포즈 한 곳도 지방의 어느 조용한 찜질방에서였다. 사람이 없어 넓은 찜질방에는 나와 아내 밖에 없었는데 나는 아내와 나란히 누워서 있다가 조용히 '결혼해달라'는 말을 꺼냈다. 그러자 아내는 어이가 없는 듯 고개를 좌우로 흔들면서 손에 들고 있는 수건으로 얼굴에 맺힌 땀방울만을 아무 말없이 훔쳤다. 나는 무릎꿇고 앉아 주문해 놓은 달걀을 손에 들고 비굴한 표정으로 아내에게 바치면서 '결혼해 주시면 평생 달걀 삶아드릴께요'라고 외쳤다. 아내는 삶은 달걀을 좋아하였다. 그래도 아내가 반응이 없자 나는 벌떡 일어나서 찜질방 구석에 있는 불가마방으로 들어가서는 안쪽에서 문을 잠궈버렸다. 10분도 참기 어려운 곳에 내가 20분 이상 불가마방에서 나오질 않자 아내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불가마방 앞으로 다가왔다. 30분이 지나고 1시간이 지나도 내가 나오질 않자 아내는 불가마방 문을 열어보려고 시도했지만 나는 안에서 탈수로 기절을 해버린 후였다. 타인에게 낯을 잘 가리는 아내가 용기를 내 종업원을 불러왔지만 종업원은 자리를 비운 주인만이 열쇠를 가지고 있다는 말을 했다. 그 말을 듣자 마자 아내의 얼굴이 갑자기 창백해지면서 아내도 그만 쓰러지고야 말았다. 119구조대가 나타나서 찜질방 문을 뜯어내고 나를 구출하고 응급실로 나와 아내를 나란히 데리고 갔는데 치료후에 먼저 깨어난 건 바로 나였다. 나는 다시 부시시 일어나 아내의 침대를 찾아 옆에 서서 복잡한 응급실 한 복판에서 다시 크게 외쳤다. "최현수 결혼해줘!" 응급실의 모든 사람들이 나를 바라보고 누워있는 아내를 바라보았다. "최현수! 결혼해줘." 내가 다시 크게 외치자 아내는 그대로 누워 모기 기어가는 아주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 "알…았…어. 결혼해." "그냥 물흐르는 대로 의식을 나룻배처럼 띄우는 수밖에… 2008년 12월 19일 몸에 힘이 없다. 허기진 몸을 움직일 수 있는 몸 속의 에너지 자체가 완전히 고갈된 듯하다. 휘발유 없는 자동차처럼 몸의 모든 기능이 올스톱이 된 것같다. 뭐라도 먹어야 된다는 생각만이 머리 속에 가득차 있다. 글도 길게 쓸 수가 없다. 누가 나에게 먹을 것 좀 가져다 주면 좋으련만 반나절을 누워있어도 누가 하나 음식을 가져다 주는 사람이 없었다. 시간이 꽤 흘러 창밖이 어둑어둑해지자 이상하게도 허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오늘 하루 종일 먹은 거라고는 수돗물 밖에 없었지만 다시 침대에 누워 눈을 감고 누우니 잠시 머리 속이 개인 푸른 하늘처럼 맑아졌다. 아내가 지금은 집에 없지만 나를 계속 이렇게 굶겨 놓진 않을 것이다. 음식거리를 두 손 가득히 장만하고 언젠가는 아파트 현관문을 열고 나타날 것이라는 희망에 기분까지 좋아졌다. 아내는 내가 좋아하는 요리를 해주기 위해 집에 들어오자 마자 부엌으로 향할 것이다. 김치와 꽁치를 듬뿍 넣고 갖은 양념을 넣은 꽁치조림은 내가 질리지 않고 좋아하는 아내의 요리이므로 준비하는 만찬에 분명히 오를것이다. 내 평생 먹은 꽁치의 양은 아마 원양어선 한 가득 될 것이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나는 도시에서 태어나 쭉 도시에서만 자라났고 어촌은 커녕 바닷가에 놀러간 것도 손을 꼽을 정도였지만 유난스럽게 생선요리를 좋아했다. 갈치. 고등어. 민물고기부터 바닷생선까지 죄다 회를 하든지 매운탕을 하든지 집에서 먹는 식사에는 반드시 작은 생선 한 토막이라도 상 위에 올려져 있어야지 생선없는 식사는 영 밥을 먹은 것같지 않았다. 그런데 김치를 반드시 먹어야 되는 한국인들 중에 김치를 담굴 수 있는 한국인의 수가 적은 것처럼 나는 생선요리를 먹기는 좋아 했지만 직접 생선을 도막내고 내장을 꺼내고 요리하는 건 정말 질색을 하였고 요리되기 전 생선의 비린내조차 맡기 싫어했다. 아마 그 이유가 결혼 안간 삼촌들과 고모들까지 한 지붕 아래 바글거리며 살던 우리집에서 내가 가장 서열이 낮아 생선 사오는 심부름과 화로에 올려진 생선이 더 잘 굽히도록 부채질을 하는 일을 도맡아 하였지만 정작 밥상 위에 올려진 생선의 살은 전혀 구경도 못했던 환경 때문에 요리되기 전의 생선을 꼴도 보기 싫어한 것이 아닌가 나 나름대로 추측해 보았다. 그러니 당연히 생선요리의 몫은 아내다. 통조림은 맛이 없다는 나의 신신당부에 수산시장으로 직접 가서 싱싱한 생선을 사가지고 왔다. 재빠르고 능숙한 솜씨로 생선을 금방 다듬고 요리를 바로 만들어내는 아내를 바라보면서 나는 아내말고 이 세상 어느 누구가 나를 위해 저렇게 징그럽고 비린내나는 생선을 다듬어 천상의 요리를 공짜로 해줄 수 있는지 생각했다. 사실 나는 아내의 앞모습보다 부엌에서 생선을 요리할 때의 뒷모습을 더 좋아했다. 남들의 눈에는 평범할지는 몰라도 생선을 내리치고 다듬을 때 흔들리는 허리와 몸의 곡선은 침을 삼킬 정도로 유혹적이였다. 그래서 나 자신이 마치 다른 여인을 몰래 훔쳐보고 마음 속으로 온갖 야릇한 상상을 하는 관음증 환자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감히 다른 여자는 흉내도 낼 수 없는 순백색의 관능미와 빠져들면 들수록 더 감미롭고 달콤한 강렬한 전류같은 기운들이 아내의 요리하는 모습 속에서 나왔다. 숨이 헉하고 막혀버릴 것같이 퇴폐적인 느낌도 들었지만 그건 반드시 회개해야만 하는 죄가 아니라 공중의 천사들조차도 크고 큰 비밀로 덮어줄 것만 같은 엄숙한 의식같은 것이였다. 의식? 결혼식? 그래 난 지금 신혼생활에 젖어있는 것이다. 갑자기 신혼의 달콤함이 흘러넘쳤다. 기타 피크같은 생선비늘들이 공중에 날리면서 천장의 불빛을 반사할 때 쯤이면 아내와 나만의 신령한 제사행사의 절정단계에 도달했다. 절정이 되면 더 이상 나는 남편이 아니고 아내는 더 이상 아내가 아니였다. 육체의 구분은 더 이상 무의미한 완벽하게 하나가 된 존재가 되었다. "그런데… 아내는 무슨 요리를 좋아했지?" 불쑥 튀어나온 이 질문으로 나는 인간의 기본욕구인 식욕도 잊게해 준 환상을 단숨에 날려버렸다. 아내가 무슨 음식을 좋아하는지 도통 생각이 나질 않았다. 매일 식후에 과일을 깎았는데 과일을 좋아했나? 2008년 12월 18일 알 수 없는 분노가 다시 한번 마음을 휩쓸었다. 불처럼 활활 타올라 내 주위를 온통 불바다로 만들 것 같다. 이렇게 불 타오를 거라면 그래 차라리 나 혼자인 것이 나아. 내가 불타오르고 남는 것은 재일까? 재의 양은 얼마나 될까? 재가 바람에 날아가버릴까? 아 바람에 날아다닌다면 정말 좋겠다 내가 가보지 못했던 곳 내가 만나보지 못했던 사람 그리고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 아내를 찾아갈 수 있을 지도 모른다. 불타는 것은 뜨겁고 싫지만 아내를 만날 수 있다면 아무 상관이 없다 머리속에는 아내 밖에 없다 현수 현수 현수 신혼인데 왜 아내가 없는거야? 여보 2008년 12월17일 오늘 아프다 마음이 아프다. 우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더 아프다 혹시 오늘 너무 아파서 죽은 것이 아닐까? 누구한테 알려야 하지 않을까? 내가 너무 아프다고 다행히 머리 속에서는 점점 고통이 잊혀진다 아프긴한데 몇 분 전의 고통은 기억나지 않는다. 점점 기억이 짧아진다. 내가 종이에 뭔가를 쓴다. 그런데 쓰려고 하면 잊어버린다. 도대체 내가 뭘 쓰려했을까? 아니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걸까? 아니 내가 지금 왜 이렇게 앉아서 있지? 아니 난 도대체 누구일까? 책상에서 난 일어선다. 방문의 문을 연다. 차가운 바람이 얼굴을 때린다 순간 모든 것이 갑자기 명확해진다. 그래 나는 무슨 병에 걸린거야 여기서 있다가는 머리 속의 기억들이 다 말라버릴거야 그렇게 되면 아내를 찾고 싶어도 찾을 수 없어 지금 밖으로 나가서 아내를 찾는 수 밖에 없어 내 몸과 같은 기억을 했던 아내를 찾아야 해. 아파트의 현관문을 향해 걷는다. 문을 여는데 눈에 팻말이 달린 목걸이 같은 것이 보인다 팻말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저는 알츠하이머 환자입니다. 저의 집 전화 번호는 (xxx)xxxx-xxxx입니다. 혹시 제가 도움이 필요해 보이면 위의 전화로 전화 부탁합니다.' 나는 그 목걸이를 목에 건다 아내가 왜 날 버린지 기억이 나질 않지만 머리 속에는 아내 밖에 없으므로 내 기억을 찾기 위해 밖으로 나간다. 〈끝〉

2009-04-27

'중앙신인문학상' 발표…단편소설 이준혁 '이혼남의…' 시·시조 이서현 '햇빛 여행' 논픽션 박은아 '귀 향기'

중앙일보·중앙방송이 1만달러의 파격적 상금을 내걸고 공모한 중앙신인문학상 당선작으로 단편소설 부문에 이준혁씨의 ‘이혼남의 신혼일기’, 시·시조부문에 이서현씨의 ‘햇빛 여행’이 당선작으로 선정됐다. 또한 논픽션 부문 당선작으로는 박은아씨의 ‘귀 향기’가 차지했으며 평론 부분에는 당선작 없는 가작으로 이권재씨의 ‘상실과 실어를 치유하는 글쓰기-한혜영론’이 수상했다. 이외 단편소설 가작으로는 김선희씨의 ‘네자매’와 이화선씨의 ‘길동이 엄마’가 시·시조 부문 가작에는 박선옥씨의‘아버지의 북’과 김효남씨의 ‘바나나 먹는 법’이 뽑혔다. 논픽션 부문 가작으로는 윤종범씨의 ‘장미꽃 눈물’이 선정됐다. 한인들의 문학에 대한 관심을 고취시키고 역량있는 신인들을 발굴해 이민문단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 본사가 매년 실시해오고 있는 신인문학상의 이번 공모에는 전국에서 200여명이 응모, 한인들의 문학에 대한 열정을 읽게했다. 소설 부분 심사를 담당한 소설가 송상옥씨는 “전반적으로 응모작들이 사실성이 결여된 이야기 구조와 장황한 설명이 많았다”고 지적하며 “이혼 후 감정 상태를 진솔하게 일기 형식으로 써내려간 당선작(이혼남의 신혼여행)의 조리있는 문체”를 수상 이유라고 설명했다. 시부문 심사를 담당한 김호길, 배정웅 시인은 전체적으로 응모작들이 “지나치게 평면적이었다”며 이에비해 당선작(햇빛 여행)은 시적 상상력과 수사력에서 뛰어났다고 평했다. 평론과 논픽션 부문 심사는 문학평론가 박영호씨가 담당했다. 할리우드 장로병원 후원으로 마련한 중앙일보 신인문학상 공모전 시상식은 오는 4월17일 중앙일보에서 열린다. ▷문의: (213)368-2652

2009-03-30

[사고] 미주 최고 권위 중앙신인문학상, 응모마감 6일 앞으로

중앙일보·중앙방송이 ‘2009년 중앙신인문학상’의 작품을 공모합니다. 응모 작품수와 수준에서 가장 권위있는 문예공모 행사인 중앙신인문학상은 미주 지역 신인작가와 평론가들의 등용문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매년 실시하는 본사의 문예공모전은 한인 언론사상 처음으로 총 1만달러의 파격적인 상금을 지급해 문학 지망생들의 문단 진출을 돕고 있습니다. 모집 부문은 단편소설, 시·시조, 논픽션, 평론으로 미주에서는 유일하게 평론 부문을 포함시켜 문학상의 전문성을 높였습니다. 특별히 이번 공모전에는 할리우드 장로병원이 협찬사로 참여합니다. 본지는 공모전 입상자들이 창작 및 평론 활동을 지속적으로 할 수 있도록 지면을 통해 적극 지원하고 있습니다. 문학과 평론의 꿈을 키우고 있는 신진 작가와 평론가들의 많은 응모 바랍니다. ▶모집부문 -단편소설(원고지 80장 내외 분량 1편) -시·시조(3편 이상, 분량 제한 없음) -논픽션(원고지 70장 내외 분량 1편) -평론(원고지 60장 내외 분량 1편) ▶상금 -단편소설(당선작 1편: 2000달러, 가작 2편: 각 1000달러) -시·시조(당선작 1편: 1000달러, 가작 2편: 각 500달러) -논픽션(당선작 1편: 1000달러, 가작 2편: 각 500달러) -평론(당선작 1편: 1000달러, 가작 2편: 500달러) ▶응모마감: 2009년 3월9일(월), 마감일 우편소인 유효 ▶입상작 발표: 2009년 3월31일(화) 본보 지면 ▶보낼 곳: The Korea Daily / 690 Wilshire Place / LA, CA 90005(중앙일보 편집국 중앙신인문학상 담당자 앞) 또는 이메일 ayhe@koreadaily.com ▶응모요령 -신문, 잡지, 단행본 등에 발표된 적이 없는 순수 창작이어야 함. -필명을 사용할 경우 본명을 밝힐 것. -입상작은 본보에 게재된 후 판권을 2년간 본사가 소유함. -응모작은 이메일이나 CD로 보내고 자필 원고일 경우는 원본과 함께 복사본 2부를 보내면 됨. ▶특별 협찬: 할리우드 장로병원 ▶문의: (213)368-2652

2009-03-02

[사고] 중앙신인문학상 공모…1만불 파격 상금

중앙일보·중앙방송이 ‘2009년 중앙신인문학상’의 작품을 공모합니다. 응모 작품수와 수준에서 가장 권위있는 문예공모 행사인 중앙신인문학상은 미주 지역 신인작가와 평론가들의 등용문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매년 실시하는 본사의 문예공모전은 한인 언론사상 처음으로 총 1만달러의 파격적인 상금을 지급해 문학 지망생들의 문단 진출을 돕고 있습니다. 모집 부문은 단편소설, 시·시조, 논픽션, 평론으로 미주에서는 유일하게 평론 부문을 포함시켜 문학상의 전문성을 높였습니다. 특별히 이번 공모전에는 할리우드 장로병원이 협찬사로 참여합니다. 본지는 공모전 입상자들이 창작 및 평론 활동을 지속적으로 할 수 있도록 지면을 통해 적극 지원하고 있습니다. 문학과 평론의 꿈을 키우고 있는 신진 작가와 평론가들의 많은 응모 바랍니다. ▶모집부문 -단편소설(원고지 80장 내외 분량 1편) -시·시조(3편 이상, 분량 제한 없음) -논픽션(원고지 70장 내외 분량 1편) -평론(원고지 60장 내외 분량 1편) ▶상금 -단편소설(당선작 1편: 2000달러, 가작 2편: 각 1000달러) -시·시조(당선작 1편: 1000달러, 가작 2편: 각 500달러) -논픽션(당선작 1편: 1000달러, 가작 2편: 각 500달러) -평론(당선작 1편: 1000달러, 가작 2편: 500달러) ▶응모마감: 2009년 3월9일(월), 마감일 우편소인 유효 ▶입상작 발표: 2009년 3월31일(화) 본보 지면 ▶보낼 곳: The Korea Daily / 690 Wilshire Place / LA, CA 90005(중앙일보 편집국 중앙신인문학상 담당자 앞) 또는 이메일 ayhe@koreadaily.com ▶응모요령 -신문, 잡지, 단행본 등에 발표된 적이 없는 순수 창작이어야 함. -필명을 사용할 경우 본명을 밝힐 것. -입상작은 본보에 게재된 후 판권을 2년간 본사가 소유함. -응모작은 이메일이나 CD로 보내고 자필 원고일 경우는 원본과 함께 복사본 2부를 보내면 됨. ▶특별 협찬: 할리우드 장로병원 ▶문의: (213)368-2652

2009-02-16

[파워 블로거 @ 코리아데일리닷컴-2] 신인문학상 우수상 오연희씨

하지만 쓰임새는 무궁무진하다. 삶을 기록하다보니 다른 사람의 인생에 관여하는 일들도 보이고 정보도 넘쳐난다. 코리아데일리닷컴에서 활약중인 J블로거들을 소개한다. "블로그에 하우스 렌트할때 주의할 점을 문의한 적이 있지요. 어떤 전문가가 잘 정리해서 올려놓더군요. 그래서 렌트 놓을때 조심할 점을 요청했더니 집주인 입장서 주의할 점을 좌~악 올려주셨서 좋은 정보가 됐습니다. " 지난 2002년 봄 코리아데일리닷컴 전신인 중앙USA닷컴의 첫 통신원으로 첫발을 내딛은 이후 중앙일보 오픈 소사어이티의 안방마님인 오연희(58.사진)씨. 현재는 J통신원 블로그를 통해서 세상과 소통하고 있다. "이민 생활이 좀 외롭잖아요. 같지 않은 것도 많고 그런데 나랑 비슷한 처지에서 공감대를 이뤄 함께 정보를 나누는 사람들과 서로 위로하는 삶이 가능해졌습니다. 덜 외로워요." 이미 슬하의 1남1녀는 대학을 졸업하고 딸은 뉴욕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탓에 인터넷과 J블로그는 그의 삶에서 상당히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오씨는 "블로그에는 정말 훌륭한 미주 한인들이 많이 활동하고 있다"면서 "주식 한의학 부동산 등 필요한 것이 있다면 모두 찾을 수 있는 '진짜' 정보의 보고"라고 말했다. 그는 많은 네티즌들이 스스로 글을 잘 쓰지 못한다며 블로거가 되는 것을 망설이고 있다며 누구든 자기 분야나 자신이 잘 알고 있는 내용을 잘 정리해서 블로그에 올리면 생각지도 못한 많은 사람들이 유익한 정보로 활용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오씨는 사실 2002년 7월부터 자녀교육과 관련된 '학부모 일기'라는 칼럼을 중앙일보 교육 섹션에 꾸준히 썼고 이듬해엔 중앙신임문학상 논픽션 부문에서 우수상을 수상하기도 한 문인이다. 또한 2007년 6월엔 산문집 '시차속으로'와 시집 '호흡하는 것들은 모두 빛이다'를 내놓기도 했다. 현재는 J블로그와 문인협회 웹사이트에서 여러 칼럼을 올리고 있다. ▷오연희씨의 블로그: http://blog.koreadaily.com/jenny_2003 장병희 기자

2009-01-16

[사고] 중앙신인문학상 공모…1만불 파격 상금

중앙일보·중앙방송이 ‘2009년 중앙신인문학상’의 작품을 공모합니다. 응모 작품수와 수준에서 가장 권위있는 문예공모 행사인 중앙신인문학상은 미주 지역 신인작가와 평론가들의 등용문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매년 실시하는 본사의 문예공모전은 한인 언론사상 처음으로 총 1만달러의 파격적인 상금을 지급해 문학 지망생들의 문단 진출을 돕고 있습니다. 모집 부문은 단편소설, 시·시조, 논픽션, 평론으로 미주에서는 유일하게 평론 부문을 포함시켜 문학상의 전문성을 높였습니다. 특별히 이번 공모전에는 할리우드 장로병원이 협찬사로 참여합니다. 본지는 공모전 입상자들이 창작 및 평론 활동을 지속적으로 할 수 있도록 지면을 통해 적극 지원하고 있습니다. 문학과 평론의 꿈을 키우고 있는 신진 작가와 평론가들의 많은 응모 바랍니다. ▶모집부문 -단편소설(원고지 80장 내외 분량 1편) -시·시조(3편 이상, 분량 제한 없음) -논픽션(원고지 70장 내외 분량 1편) -평론(원고지 60장 내외 분량 1편) ▶상금 -단편소설(당선작 1편: 2000달러, 가작 2편: 각 1000달러) -시·시조(당선작 1편: 1000달러, 가작 2편: 각 500달러) -논픽션(당선작 1편: 1000달러, 가작 2편: 각 500달러) -평론(당선작 1편: 1000달러, 가작 2편: 500달러) ▶응모마감: 2009년 3월9일(월), 마감일 우편소인 유효 ▶입상작 발표: 2009년 3월31일(화) 본보 지면 ▶보낼 곳: The Korea Daily / 690 Wilshire Place / LA, CA 90005(중앙일보 편집국 중앙신인문학상 담당자 앞) 또는 이메일 ayhe@koreadaily.com ▶응모요령 -신문, 잡지, 단행본 등에 발표된 적이 없는 순수 창작이어야 함. -필명을 사용할 경우 본명을 밝힐 것. -입상작은 본보에 게재된 후 판권을 2년간 본사가 소유함. -응모작은 이메일이나 CD로 보내고 자필 원고일 경우는 원본과 함께 복사본 2부를 보내면 됨. ▶특별 협찬: 할리우드 장로병원 ▶문의: (213)368-2652

2009-01-11

많이 본 뉴스




실시간 뉴스